케네디·레이건이 文대통령에게 말한다 "협상은…"

[the300][남북이 연결된다]<4>연결의 조건-②전쟁과 평화, 서밋의 교훈

김성휘 기자 l 2018.09.13 04:24
그래픽=이승현 디자인기자


지도자의 결단은 핵전쟁을 막았다. 반대로 지도자의 고집은 위기를 낳기도 했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상회담(summit)들이 18~2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중요한 선례를 남긴다. 오해를 피해야 하며, 긴 여정이라도 일단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이다. 실패가 주는 교훈도 있다.

1962 쿠바, 팩트체크 했더라면= 1962년 10월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짓는 것을 미국이 포착했다. 미국과 소련은 상대의 팽창주의와 군사력을 의심했고 과장해서 받아들였다. 오해는 오판을 낳았다. 적대관계에서 '팩트체크'는 더욱 어려웠다. 갈등은 고조됐고 마침내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 입구까지 갔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현명했다. 오해와 시간차를 줄이려 최측근 비밀접촉에 나섰다.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소련의 턱 밑에 있던 미군 핵미사일도 철수를 약속했다. 소련은 쿠바 프로젝트를 접었다. 미·소는 마침내 핵실험 제한 등 군축 협상을 개시한다. 1963년부터 데탕트 즉 긴장 완화 국면이 시작됐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1986 레이캬비크, 실패에서 배운다= 레이캬비크는 아이슬란드 수도. 19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고르비) 소련 서기장이 마주앉았다. 이날 핵군축 협상의 결론은 빈손이었다. 레이건은 스타워즈로 불린 전략방위구상(SDI)을 고집했다. 고르바초프는 SDI 제한을 요구했다. 양 정상은 굳은 표정으로 서먹하게 회담을 마쳤다.

반전은 협상 결렬 후 시작됐다. 미·소 정상은 서로의 '바닥'을 봤다.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양보할 수 없는 선은 무엇인지 파악했다. 1987년 재회담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SDI가 실제 효용은 크지 않다는 점도 고르비를 움직였다. 미·소는 사정거리 1000km를 넘는 중거리미사일을 모두 폐기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핵군축의 이정표다. 

1989 몰타, 그래도 만나라= 1989년 12월 2일, 미국은 조지 W 부시(아버지 부시)로 대통령이 바뀌었다. 부시는 고르비를 지중해의 섬 몰타에서 만났다. 핵군축 협상의 연장이다. 미·소 정상은 이번에도 구체적 합의엔 실패했다. 그러나 두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은 문서 못지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냉전 종식이다. 

고르비는 "세계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며 "우리는 평화로 향하는 긴 여정의 시작에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몰타 회담이 사실상 냉전의 끝이었으며, 최소한 동서 긴장을 크게 낮춘 이정표였다고 본다. 레이캬비크부터 계속된 공감대는 1991년 전략무기감축협정, 영어 첫글자를 딴 'START'로 이어졌다. 남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 1992년 비핵화 공동선언을 각각 도출한다.

2018 평양, 끊임없이 확인하라= 쿠바 핵위기 이후 미소가 군축에 나선 건 북한이 6차에 이르는 핵실험을 한 이후 남북이 극적인 판문점선언을 끌어낸 것과 대비된다. "긴 여정의 시작"이란 고르비의 말은 30년 후인 현재, 한반도 문제가 해결의 입구에 서 있다는 표현과 이어진다.

이제 평양이다. 문 대통령은 남·북·미 3자의 오해를 줄이고, 대화의 시간차를 벌리지 않아야 한다. 1962년 쿠바에서 본 대로다. 판문점에서 싱가포르로 이어진 한반도 대화는 끊임없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라는 교훈도 남겼다. 문 대통령은 고비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거나 전화통화, 또는 특사를 직접 보내 오해의 여지를 줄였다. 북한에 대해서도 중재자이자 연결자로 신뢰 받는다.

문 대통령은 평양 정상회담에 대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다시 한 번 큰 걸음을 내딛는 결정적인 계기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밝혔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순간이 어쩌면 역사에 남을 결정적 순간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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