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20대 영리더', 임시정부에 "건의합니다"

[the300][창사20주년 기획- 새로운 100년 이끌 '영 리더']<3>-②100년 시공간 초월한 영리더의 시대가치

조철희 조준영 기자 l 2019.01.03 04:20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던 안재홍의 얼굴. /사진=국사편찬위원회

"감히 시국의 중요한 안건을 건의합니다. 내각은 채택해 실행해 주십시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당시 20대 '영 리더'(Yong Leader)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건의서' 말머리다. 


100년 전 민족사의 대전환이 시작되던 순간, 영리더가 있었다. 20대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연 임시정부에 "각 계파가 협동해야 한다", "감정적 충동의 폐해가 없어야 한다", "상하이에 집중해 정무를 통일하라", "각국 정부에 외교관을 특파해 외교를 확장하라"고 건의했다. 

이들은 망명 정부를 이끌던 김구, 이승만 등 40대 선배 리더들에게 적극적인 글로벌 외교전과 각 계파 간 협치를 촉구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에도 외교관을 파견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정면으로 요구하라"고 당차게 외쳤다. 독립운동에도 필요했던 모험정신과 새로운 상상력으로 뭉친 이들의 건의에 임시정부도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국무총리 대리였던 안창호가 직접 청년외교단에 '회답'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해 광복절을 기념해 국회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도 이들 영리더들의 역사가 재조명됐다. 황민호 숭실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청년외교단은 안재홍(1919년 당시 29세), 연병호(26) 등 20대가 이끌었다. 자매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도 김마리아(28), 황애덕(28) 등 젊은 여성들이 리더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와 함께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방식은 '소통'이었고, 소통의 대상은 '세계'와 '공동체'였다. 일제의 광폭한 탄압을 뚫고 국내외에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100년 후 지금의 영리더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의 전조와도 같다.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단 단원들에 대한 재판 관련 1920년 당시 신문 기사.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청년외교단은 비밀결사 형태로 임시정부의 뒤를 받쳤다. 당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의제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파리강화회의를 비롯해 임시정부가 국제사회를 향해 벌이는 외교활동을 지원했다. 

애국부인회는 이미 100년 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새 세상의 주역으로서 함께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애덕은 도쿄 유학생 모임에서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사를 관철시켜 여학생들도 모임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애국부인회 회장인 김마리아는 "유무식을 막론하고 빈부와 귀천의 차별이 없이 이기심을 다 버리고 국권확장 네 글자만 굳건한 목적으로 삼자"며 "성공을 확신하고 장애물을 개의치 말고 더욱 진력해 일심으로 합력하자"고 했다. 김마리아와 황애덕은 여성단체를 이끌며 중국 상하이에 거점을 둔 임시정부가 절실했던 국내 조직망의 확충에 기여했다. 

임시정부에 보낸 건의서를 작성하는 등 청년외교단을 앞장서 이끈 안재홍은 고향인 경기도 평택 월명산에서 3·1 만세운동의 광경을 바라본 소회를 이렇게 썼다.

"높다란 봉우리에 서서 바라보니 원근 수백리 높고 낮은 봉과 봉, 넓고도 아득한 평원과 하천지대까지, 점점이 피어오르는 화톳불과 천지도 들썩거리는 듯한 독립만세의 웅성궂은 아우성은 문자 그대로 인민반항이요 민족항쟁이었다."

100년 전에도 이땅 곳곳에서 타올랐던 불꽃과 함성은 이후로 100년 동안 새로운 세상으로 진전할 때마다 반복됐다. 그때마다 영리더들은 새 세상을 열기 위한 마중물이 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앞으로 100년 또한 영리더들의 도전과 탐험에 미래상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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