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이 독립없다"…캘리포니아에 울려퍼진 '코리안 랩소디'

[the300][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나라를 세운 기업][3]-①멀리서 큰 힘 됐던 미주 독립운동…사라진 기업 '김형제상회'가 자금줄

LA, 샌프란시스코, 리들리(미국)=이재원 기자 l 2019.04.24 04:00

편집자주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현 국회)이 개원했고, 하루 뒤인 11일 임시정부가 설립됐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이곳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가는 시작점이었다. 같은해 3.1운동을 비롯해 임정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 민족기업들이 나섰다. 이들 기업 창업주는 사재를 털어 독립 자금을 댓고, 기업의 이윤을 나라 구하는데 썼다. 머니투데이는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당시 민족기업의 자취를 취재했다. 이들 기업이 100년 후 지금 기업에게 남긴 메시지를 5회에 걸쳐 보도한다.


1942년 8월29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도로 LA 시청 앞에서 열린 태극기 게양식/사진=LA 시청 제공


LA(로스엔젤레스) 다운타운 1번가와 스프링 스트리트(spring st.)가 만나는 곳. 77년 전 그날을 기억하는 LA 시청사 앞의 날씨는 화창했다. LA 경찰청을 마주하고 그 곳. 이젠 사진으로만 접할 수 있는 그날이다.

1942년 8월29일 LA 시청 앞에서는 미 서부 한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도로 태극기 현기식(계양식)이 열렸다. LA 시청 정문 깃대에 태극기가 나부꼈다. LA 시가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77년이 지난 지금 이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시청 정문은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태극기가 걸렸던 게양대는 찾을 수 없었다. 시청 관계자들 역시 사진 자료만 가지고 있을 뿐 당시 참석자들이나 오갔던 내용에 대해선 확인할 수 없었다.

1942년 태극기 게양식이 열렸던 LA 시청사 앞의 현재 모습/사진=이재원 기자


다만 LA 한인회가 '미주 한인의 날' 등을 기념해 태극기 게양식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올해 1월12일에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LA 한인회 주최로 국기 게양식이 열렸다. 

이번달 1일부터 5일까지 닷새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주도이자 미 서부 최대 도시인 LA를 시작으로 100여년 전 미국 서부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봤다. LA에서 캘리포니아 중부 소도시 리들리(reedley)를 거쳐 캘리포니아 북부 대도시 샌프란시스코까지 8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물리적 거리 때문에 중국 상해, 충칭만큼 임시정부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마음은 어디든 같았다. 현지에서 기업을 세워 자금을 모으고, 십시일반 해 유학생들을 돌봤다. 공부를 마친 유학생들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기업을 세우거나 조직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LA 시청에서 열린 태극기 게양식에 앞서서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맹호군 창설이 있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1941년 12월22일 한인국방군편성계획을 마련해 미 육군사령부에 제출한 것이 시작이다.

맹호군 사열식 사진/사진=국사편찬위원회


진주만 공습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지 2주가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미 육군사령부도 이를 허가했고 150여명의 한인을 모아 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2년 2월2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준을 받으며 공식 출범했다.

맹호군은 주1회 LA 시내에 있는 익스포지션공원(exposition park)에서 훈련을 가졌다. 이곳 역시 현재는 과학박물관이 들어선 상태다. 맹호군의 훈련장이었다는 사실은 사료로만 남았다. 맹호군은 샌프란시스코에도 훈련장을 마련하고 훈련에 힘을 쏟았다. 샌프란시스코에도 맹호군 본부와 훈련장 등이 있었지만 현재는 쇼핑센터, 아파트 등으로 바뀌었다. 

LA 시내 맹호군 훈련장으로 쓰였던 익스포지션 공원의 현재 모습/사진=이재원 기자


이 맹호군의 창설을 주도한 이가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다. 유 박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6년 한국에서 유한양행을 창업한 뒤 1938년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는 1942년 8월29일 LA 시청 태극기 게양식에서 맹호군을 대표해 충칭임시정부의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무렵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한 유 박사는 1922년 대학 동창과 함께 '라초이'라는 식품 통조림 회사를 세워 큰 돈을 번다. 그는 1926년 귀국하며 경영권 몫으로 30만달러를 받았는데, 당시 조선은행권으로 120만원 상당이다. 당시 서울 사대문 안의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고 한다. 라초이는 아직도 미국에서 음식 통조림 전문업체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38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며 유한양행의 경영을 동생 유특한에게 맡긴 유 박사는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로 본격 활동한다.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을 맡으며 1942년부터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했고, 1945년에는 OSS의 한국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에 공작원으로 입대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사진=유한양행 제공


당시 유일한은 50살을 넘긴 나이었지만, 공수훈련을 비롯해 모든 훈련을 소화했다. 작전 실행 전 광복을 맞아 작전을 실제로 수행하지는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낸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미국은 한반도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냅코작전은 상륙부대에 길을 틔워추기 위해 추진됐을 것"이라며 "비록 불발됐지만, 독립운동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LA 한인회에 따르면 유 박사는 당시 한국에 남겨두고 온 유한양행 회사 조직을 유사시에 독립운동 지하조직으로 이용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실제 유 박사는 LA는 물론 유럽 주요 국가에 출장소를 세우고 회사 간부들을 독립의식이 투철한 이들로 임명하는 등 노력했다는 것이 LA 한인회와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유 박사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했다고는 하지만, 본사를 조선에 남겨둔데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라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데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미 서부 독립운동의 핵심 자금줄이 됐던 것이 독립운동가 김호와 김형순이 현지에서 창업한 '김형제상회'였다.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가 된 이들이다. 둘은 해방 후 LA 한인재단을 설립하는 등 현재의 LA 코리안타운의 기틀을 닦은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중부 소도시인 리들리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리들리는 과일 생산지로도 유명한데, 하와이 계약이민이 끝난 이들이 2000여명이 미국 본토로 넘어오면서 대다수가 이곳에 정착했다. 몰려왔다. 태평양전쟁 시기엔 500여명의 한인 농업이민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묵었다는 명패를 붙이고 영업하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소도시 리들리의 버지스 호텔/사진=이재원 기자


지금은 미주 한인들의 중심지가 LA이지만, 당시엔 리들리였다. 현재는 한인들이 거의 살지는 않지만, 지금도 리들리에는 한인 공동묘지 등 여러 유적들이 남아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을 찾았을 때 머물렀던 '버지스' 호텔도 기념 명패를 부착한 채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 세워진 리들리 독립문,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에 세워진 원형을 1/4로 축소한 모양이다. 독립문 앞에는 김호, 김형순을 비롯해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비석이 세워졌다./사진=이재원 기자


김형순은 영어에 능통해서 1903년 최초의 미국 이민자가 하와이로 갔을 때 통역관 겸 인솔자 역할을 했다. 1906년 미국 본토로 이주한 뒤 1916년 리들리에 정착해 묘목회사를 설립하고 과수원을 경영했다. 김호는 배재학당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상하이를 거쳐 1914년 미국에 건너가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김호는 3·1운동 당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특파위원으로서 미국을 순회하면서 독립의연금을 모금했는데, 이 과정에서 "돈 없이는 독립도 없다"는 재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후 1920년부터 리들리로 가서 김형순과 함께 농장을 경영하면서 1921년경 김형제상회를 설립하였다. 

김호·김형순·한덕세(김형순의 부인)이 세운 '김형제상회' 사무실로 쓰이던 리들리 시내 건물. 현재는 부동산 회사의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사진=이재원 기자


이들은 자두와 복숭아를 접종해 털없는 복숭아인 '넥타린'을 개발했다. 이는 큰 인기를 끌었고, 미국 전역에 공급하며 큰 돈들 벌어들였다. 사업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대에는 그들의 농장 크기가 1000에이커(약 404만6800㎡)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둘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로도 꾸준히 독립자금을 보내며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이외에도 리들리 현지에 교회를 설립하고 한인 공동묘지 부지를 제공하는 등 한인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가난한 유학생들을 돌보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했다는 피터정씨는 2012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순 선생은 우리가 일을 못해도 임금을 두둑히 줬다"며 "소문이 나니 방학 때면 전국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리들리로 몰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둘은 광복 이후인 1962년 사업을 정리하고 LA로 이주하여 한인센터(한인회관 전신)을 설립했다. 리들리 부동산을 정리한 돈으로는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힘쓰다 김호는 1968년, 김형순은 1977년 각각 세상을 떴다. 김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김형순은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이 추서됐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사진제공=외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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