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비례·소수당' 박원석, 후원금 랭킹 1위 비결은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정의당 박원석 의원

박경담 기자 l 2014.12.24 17:18

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지난 2일 열린 국회 본회의. 여야 지도부가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부결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대부분이 반대표를 던진 가운데 적잖은 수의 새누리당 의원들도 반대와 기권 의사를 표시했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김관영 새정치연합 의원과 더불어 이 법안에 대한 반대토론에 나서 '이변'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진보진영 '경제통'으로 꼽히는 박의원의 진가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스토리]
 
◇"정치, 왜 합니까"

박원석은 시민사회 진영의 주류였다. 우리나라 대표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창립멤버로 18년 동안 활동했다. 2000년대 시민운동의 황금기를 관통하며 영향력도 생겼다. 그런 그가 활동을 정리하고 정치를 택했다. 그것도 진보 정당에서.

정치와 시민운동 사이엔 '거리'가 존재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운동 판에선 제도 정치 참여를 '변절'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거리를 건너 정치에 진입한 주류 NGO 활동가의 착륙지는 대개 민주당 계였다. 같은 참여연대 출신인 박원순 서울시장, 김기식 의원 모두 그랬다. 하지만 박원석의 선택은 달랐다.

'진보 정치인 박원석'을 이해하려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촛불집회의 핵심 지도부였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으로서 시민사회계의 대표 격으로 나선 것. 거리에 나온 인파는 100일 넘게 시위를 지속했지만 현실적 대안을 만들기 어려웠고 정치권은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마침표를 고민했다. 소액주주 운동, 낙천낙선 운동 등 그가 관여한 아스팔트 의제들이 국회 안에만 들어가면 동력을 상실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미우나 고우나 '정치'가 기능하지 않으면 갈등은 되풀이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를 만든 8할은 '거리의 정치'였지만 나머지를 채운 건 '현실 정치'였다.

사진제공=박원석 의원실

◇"밤낮 시민운동은 민주당 가냐"


정치에 뜻을 품은 박원석의 길은 다른 활동가와 달랐다. 야권과 시민사회 진영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혁신과 통합'을 설립, 야권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박원석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분열된 진보진영의 응집을 꾀했다.

그는 제 3당 역할론을 역설했다. 양당 체제로는 근본적인 정치·사회·경제 개혁을 할 수 없다는 것. 진보정당 원조인 민노당은 17대 국회에 제 3당으로 입성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는다. 재벌개혁·무상급식같이 구조적 이슈를 정치 테이블에 올렸기 때문이다.

'시민운동 주류' 박원석은 이런 판단 아래 '한국정치 비주류' 진보의 길을 자처했다. 그는 "시민운동 출신은 밤낮 민주당으로 간다는 정치적 혐의가 드리워진 게 사실이다"며 "제 선택이 정치를 선택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길로 여겨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 후원금 NO.1…십시일반 모여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들어온 박원석은 두 가지 일로 이름을 알렸다. 하나는 부정경선에 따른 통진당 분당 사태다. 당시 박 의원은 당 새로나기 특별위원장을 맡으며 쇄신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그의 쇄신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당은 갈라졌다.

현재 정의당 소속인 그는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소수 정당이 살아남기 위한 단기 과제로 진보의 결집을 강조했다. 양당 체제의 균열을 위해 정치구조 변화도 필요하지만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4개의 진보정당이 10% 가까이 받은 지지를 세력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 의원이 지명도를 확실히 높인 계기는 지난해 정치 후원금 1위를 기록하면서다. 초선·비례·소수당 등 3대 악재를 딛고 1억9517만원을 모금했다. 1980명의 후원자 대부분 소액 기부자였고 별도 신고 대상인 30만원 이상 기부자는 4명에 불과했다. 2012년 겨울 철도노조 파업 당시 끝까지 현장에 남은 그에게 노조원들이 지지를 모아줬다는 분석이다.

박 의원은 "한국사회 노동자들이 모아준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무겁다"며 "노동자가 바라는 사회를 만드는 게 제 역할"이라고 밝혔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뉴스1

[키워드→진보 정책통]

제도권 밖에서 정책 과제를 입법화했던 경험은 정책통으로 자리 잡는데 밑거름이 됐다. 여의도 입성 뒤 당 정책위의장을 맡으며 탈핵··부자 증세·정치 개혁 등 진보 의제들을 이끌기도 했다. 소수당의 한계 상 조직력을 통한 전술 대신 개인기로 정국을 돌파해왔다.

기획재정위원회 소속인 박 의원의 의정활동은 국정감사 때 특히 주목받는다. 올해 국감에서 국세청이 역외탈세 의혹을 받고 있는 182명 중 48명만 세무조사를 실시해 부실조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국감에서는 '동양사태'에 집중했다. 국세청이 동양그룹의 비자금 조성을 포착했지만 경영을 방치해 결국엔 동양사태로 커지는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활약 덕분에 그는 심상정 의원에 이어 진보 진영의 '경제 저격수'로 불리고 있다.

[연관검색어→참여연대, 촛불집회]

참여연대는 지금의 박원석을 있게 한 둥지다. 그는 1990년대 초 지금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인 김기식을 만나 새로운 사회운동을 모색했다. 그 결과가 1994년 창립한 참여연대다.

박원순 현 서울시장과도 함께 활동하며 통신비 문제·상가 임차인 보호·사채와 대부업 규제 등 시민의 삶과 밀접한 이슈들을 문제제기했다. 이 과제들은 실제 법 제정으로 이어져 참여연대와 박원석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2010년 무상급식 정국도 깊게 관여한 그는 생활 이슈를 진보적 의제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좋은 정치를 실현하는 게 과제라 여기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대표 법안→3대 세제 개혁 법안]
19대 국회 전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기재위에 배치된 그는 민생·복지와 세금과의 연결고리를 꾸준히 발굴하고 있다. 역외탈세방지특별법안, 기후정의세법안, 사회복지세법안 등 3개의 제정법이 대표 법안으로 꼽힌다.

역외탈세방지법은 지난 해 조세회피처 은닉 재산 문제가 불거진 이후 해외에서의 조세 포탈을 차단하자는 취지에서 발의됐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해외 투자가 많은 우리나라 특성상 역외에서 발생한 세원을 파악하고 탈세를 방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기후정의세법은 온실가스를 야기하는 모든 자원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안이다. 사회복지세법은 소득세·법인세·상속세·증여세·종합부동산세에 부가세 방식으로 사회복지세를 추가 징수한다는 것이다. 더 거둬들인 세금은 복지 목적으로 사용해 보편적 복지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이들 제정법은 모두 국회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기후정의세법은 기업 활동 위축, 사회복지세법은 법인세 증가 및 부자 증세 논란과 맞부딪히기 때문. 역외탈세방지법은 조세 형평성 차원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평이다. 
지난 8월 26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청와대 앞 단식 7일째 되던 날, 박원석 의원이 격려 차 방문한 파울 슈나이스 목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슈나이스 목사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처음 알린 인물이다,/사진제공=박원석 의원실

[존경하는 정치인→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은 그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진보 진영과 민주개혁 진영은 애증의 관계여서다. 양측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시절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선 팀플레이를, 신자유주의를 경계로는 대립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진보 정책들에 높은 점수를 줬다. 특히 "지금 돌이켜봐도 상당히 진보적"이라며 1971년 대선 공약을 거론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대중경제론과 평화통일론에 기초해 향토예비군 폐지, 노사위원회 구성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김 전 대통령의 균형감각과 폭 넓은 식견에도 존경을 담았다. 국정 모든 분야에 있어 준비돼 있었고 치우침 없었다는 설명이다. 박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수많은 고초를 견딘 것은 초인적인 인내였다"며 한국 정치 70년사에서 진정한 거인이었다"고 평했다.

[요주의!→아직 오르지 못한 진짜 검증대]

정치인의 정치력을 평가하는 두 개의 시험대에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하나는 지역구 정치, 다른 하나는 당 내 정치다.

비례 의원인 까닭에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장삼이사'의 영역에 뛰어들어 대중들과 호흡해야 2%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는 얘기다. 심상정과 노회찬 등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굳힌 당 선배들이 지역 기반을 어떻게 다졌는지 뒤쫓을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정책위의장, 원내대변인 등 임명직 당직만 맡은 것도 검증 요인이다. 박 의원은 정치적 책임을 지는 선출직 당직 경험이 없다. 자신의 정치철학과 가치를 지지해 줄 기반을 만드는 것부터 다른 정당과 파트너로서 소통·투쟁·합의하는 능력까지, 증명할 게 아직 많이 남았다.

[프로필]

△서울 출생(44) △유신고-동국대 사회학과-홍콩대 인권법 석사 △참여연대 창립발기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촛불집회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취임준비위원 △복지국가실현연석회의 상임집행위원장 △19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통합진보당 새로나기특별위원회 위원장 △정의당 원내대변인·정책위 의장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