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라면 더 신나죠~"…1987년, 마이마이 사려면 7만원돈 있어야

[the300][대한민국 1987-2018]⑧

이정혁, 최석환 기자 l 2018.01.13 09:02

편집자주 14일은 '6월 항쟁'의 불씨를 당긴 고(故) 박종철 열사 사망 31년이 되는 날이다. 머니투데이는 '영화 1987' 신드롬을 통해 대한민국의 31년전과 오늘을 짚어 봤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1987'을 본 사람들이라면 극중 연희(김태리)가 대학입학을 맞아 삼촌(유해진)에게 '마이마이'(mymy) 카세트를 선물 받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연희가 실존 인물이 아닌 만큼 실화일리는 없으나 그 당시 청소년들이 마이마이를 얼마나 탐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추억의 아이템인 마이마이. 지금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삼성 이노베이션 뮤지엄'에서 구경할 수 있지만, 그 때로 돌아가 마이마이의 인기와 함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기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봤다.

◇삼성전자, 1981년 '마이마이' 첫 출시=12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마이마이는 1981년 처음 출시된 이후 수 년 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과시하며 '없어서 못 파는' 상품으로 등극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이마이 본체 가격만 무려 6만5800원에 달했으며, 헤드폰 1개(7000원)까지 세트로 살 경우 7만2800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때문에 중·고등학생들은 용돈으로는 선뜻 살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0년대 일종의 소통 수단이었던 라디오 바람을 타고 수 많은 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한 마이마이는 '마이마이4'(1983년 출시)까지 나올 정도로 진화를 거듭했다.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입학·졸업철에 마이마이 신제품이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담뱃갑 2개 정도의 크기에 무게가 고작 400g에 불과한 것은 지금 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광고에 마이마이를 담배 '솔' 크기와 비교했다.

청바지 뒤에 쏙 넣거나 벨트에 차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인데다 무엇보다 크기에 걸맞지 않은 뛰어난 성능은 당시에 파격 그 자체였다. 테이프를 한 번 넣으면 뒤집을 필요 없이 쭉 이어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오토리버스' 기능, 헤드폰 잭이 2개가 장착돼 친구나 연인이 함께 테이프와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은 1980년대 전자업계에서 혁신이라 불렸다.

이런 세일즈 포인트에 맞춰 삼성전자는 '둘이라면 더 신나죠~마이마이', '둘이서 걷는 즐거움, 둘이서 듣는 즐거움. 신나는 리듬이 쏟아질 땐 마음도 표정도 걸음걸이도 똑같아지죠'를 광고 카피로 삼았다. 구체적인 판매량은 집계가 힘드나 삼성전자 관계자는 "마이마이가 휴대용 오디오 기기 붐을 일으킨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성기를 보낸 마이마이는 1990년대 들어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MP3를 상용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다.

마이마이와 MP3 사이에 CD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카세트 가격이 CD의 절반 이하라 마이마이는 비교적 오랫동안 휴대용 오디오 기기의 왕좌를 지켰다. MP3는 마이마이의 6분의 1 수준인 70g 내외로 가벼웠고, 수백 여곡의 노래 저장이 가능하다보니 카세트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었다.

삼성전자는 1998년 MP3 플레이어 '옙'(YEPP)에 이어 2000년 '옙넵'(Yepp–NEP)을 출시했다. MP3로 고음질의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즈음인 2006년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MP3 플레이어도 이제 마이마이의 길을 따르고 있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마이마이가 오랫동안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라디오, 음악경험의 개인화 외에도 수입품에서도 볼 수 없는 혁신적인 기능 때문"이라면서 "한국 휴대용 오디오 기기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1987 단골 등장한 현대자동차 '포니'도 새삼 주목=현대차의 국내 첫 독자 생산모델인 '포니'와 승합차의 대명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기아차의 '봉고'도 마찬가지다. 주·조연을 맡은 배우들과 직·간접적으로 엮이면서 시대의 숨은 대변자 역할을 해줬다.

1987년 당시 운행됐던 '포니'는 1982년 2월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를 거쳐 출시된 '포니2(Ⅱ)' 모델이다. 3도어 해치백과 5도어 스테이션 왜건은 판매가 부진해 없어졌고, 5도어 해치백과 2도어 적재량 0.4톤의 픽업 트럭만 생산됐다.

기존 '포니'는 캐빈 룸과 트렁크 룸이 분리된 4도어 패스트백이였지만 '포니2'는 캐빈 룸과 트렁크 룸이 연결된 5도어 해치백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충돌해도 차체 손상을 막는 에너지 흡수형 범퍼가 달린 게 특징이다.

현대차는 '포니2'를 통해 캐나다에 수출을 시작했다. 캐나다 수출용은 1984년 5월부터 국내에서 'CX'라는 트림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1985년에 전륜구동 방식의 후속 차종인 '엑셀'이 출시됐지만 병행 판매됐다. 하지만 자가용은 1988년 4월에, 영업용은 1990년 1월에 단종됐다.

'봉고'는 기아차(당시 기아산업)가 1980년 9월에 내놓은 다목적 소형화물차 봉고 1톤(E-2200)(3인승)에서 시작됐다. 영화에서 경찰들이 학생 등을 연행할 때 주로 등장한 '봉고'는 트럭이 아닌 승합차로 '봉고 코치(12인승)'라는 구분된 모델명을 썼다.

'봉고 코치'는 1981년 8월에 출시됐으며 첫 해에 1013대를 생산해 1011대를 파는데 그쳤지만 봉고 확판운동이 전개되면서 1982년에 1만1003대, 1983년에 1만3083대 등으로 판매 실적이 증가했다. 실제로 1987년까지 5만3353대가 판매·수출됐다. '봉고 코치'에 맞서기 위해 현대차가 1986년 '그레이스'라는 모델을 출시하기도 했다.

판매 가격은 출시 당시 '포니2'가 347만원, '봉고 코치'는 648만이었다. 차급으로 보면 현대차 '엑센트'나 '스타렉스(12인승)'와 견줄 수 있다. '엑센트'와 '스타렉스'의 가격은 트림별로 각각 '1142만~1600만원(가솔린 기준)', '2365만~2750만원' 수준이다. 1980년대와 비교하면 그간 4배 가량 비싸진 셈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87년 판매 실적을 보면 '포니2'가 347대, '봉고 코치'가 708대로 두 모델 모두 하향세였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잘 팔릴 때를 보면 '포니2'가 연간 3만대, '봉고 코치'가 2만대 규모였다"며 "(그래서 그랬는지) 두 모델 모두 1987년을 마지막으로 단종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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