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금융 '빅딜' 계산에 막힌 '민생·안전'

여야 법안 연계 처리에 원자력안전법 등 민생 법안 수개월째 표류…'모 아니면 도' 입법 리스크 키워

진상현 l 2014.02.22 06:00
"과거의 것만 해결해서는 (원전) 비리 근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겉도는 검사에 그칠 수 있어 우려가 큽니다. 이 점 만큼은 원안위의 특별한 사정을 감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안전 관리를 총괄하는 이은철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위원장의 호소다. 이 위원장은 지난 19일 열린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이하 미방위) 전체회의 업무보고에서 미방위에 계류돼 있는 원자력안전법 개정안의 처리를 부탁하며 이같이 말했다. 새누리당 민병주 의원은 이 의원장의 발언에 앞서 "법안 소위 위원으로 법안 통과에 힘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정말 죄송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조해진 새누리당 간사(왼쪽)와 유승희 민주당 간사(오른쪽)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뉴스1


이 위원장이 처리를 호소한 원자력안전법 개정안은 원안위의 감시대상을 사업자인 한수원에서 부품이나 기기의 설계업체, 제작업체, 공급업체, 성능검증업체까지로 확대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원전에 대한 국민 불안을 확산시킨 원전 부품 비리를 사전적으로 막기 위한 방편이다. 국민 안전과 직결된 법안인 만큼 여야 국회의원 누구도 통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법안은 수개월 째 미방위에 계류돼 있다. 민주당 소속 미방위 위원들이 KBS사장 인사청문회 개최 등 방송 공정성 관련 법안의 우선 처리를 주장하면서 다른 법안 논의를 중단하면서다. 2월 국회에서는 그나마 미방위 내부에서 방송 공정성 관련 법안들에 대한 처리 방향이 가닥을 잡았지만 여당 원내지도부가 일부 방송 법안들에 대해 다른 상임위인 정무위원회 중점 법안과의 연계 처리를 시도하면서 다시 앞길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아무 관계가 없는 방송, 금융 법안 때문에 국민의 안전 문제가 달린 원자력안전법마저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2월 국회가 후반전으로 접어든 가운데 일부 상임위의 법안 심사 행태와 여야의 법안 '패키지딜(연계처리)' 시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치적 견해가 갈리는 법안들로 인해 처리가 시급한 민생, 경제법안들까지 영향을 받고 있어서다.

미방위의 파행적인 법안 심사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원자력 안전과 관련된 법안 외에도 이동통신업계 초미의 관심사인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 구조 개선법(단통법)’ 등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법안, 기초기술연구회와 산업기술연구회를 '과학기술연구회'로 통합하는 법안 등 과학 분야 법안도 여야의 별다른 이견이 없는데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카드 개인정보 대규모 유출 사태 이후 처리가 시급해진 개인정보 보호 강화를 위한 '정보통신망법', 전기통신사업법의 경우 법안소위에서는 가결이 됐는데도 다음 단계인 전체회의 상정을 못하고 있다. 미방위가 방송 공정성 법안을 포함한 일부 법안들의 일괄처리를 전제로 법안을 심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월 국회에서는 다른 상임위 동향까지 살펴봐야 하는 처지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방송 공정성 관련 법안 중 운영위원회 소관 법안 2개를 정무위원회에 계류중인 금융소비자보호법안(금소법)과 크라우드펀딩 법안(자본시장법 개정안) 등과 연계 처리하는 방안을 거론하면서다. 새누리당이 요구하는 정무위 법안, 방송 공정성 법안, 미방위 다른 법안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어느 것 하나 처리를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 된 셈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새누리당의 정무위 법안 요구에 민주당은 또다른 정무위 법안 통과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고, 각당 원내지도부 차원에서는 기초연금법안 등 주요 법안들을 포함하는 또다른 '빅딜'을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법안들간의 연계 처리가 여야 대치국면에서 중점 법안 처리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도 있지만 국회의 법안 심사 문화를 퇴행시키고 민생 법안 처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묶음으로 법안들이 처리될 경우 개별 법안들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고 민생 법안 등 정치적인 쟁점이 없는 법안까지 처리가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패키지 딜'을 추진하다 성사되지 않을 경우에는 다수 법안이 통째로 처리되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법안을 처리해야하는 각 당 입장에선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면서 "이견이 없는 민생 법안들까지 처리가 되지 않는데 대해서는 국민들이 용납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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