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이 공항까지 나가 모신 '황소'…원유철, 도약대 오르다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원유철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박경담 기자 l 2015.04.09 05:59

편집자주 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국무총리 내정된  지난 1월.
남미출장을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한 원유철 새누리당 의원(53·경기 평택갑)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이완구 의원의 총리내정으로 공석이 된 원내대표 선거에 나선 유승민 의원이었다.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 후보로 원 의원을 붙잡기 위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이다. 
유의원과 맞선 이주영 의원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원의원을 영입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유 의원의 '삼고초려' 끝에 두 사람은 경선 5일 전 짝을 이뤘고 결국 이주영-홍문종 조를 눌렀다. 경선 과정 초기만 해도 당선이 유력했던 이주영 의원이 고배를 든 것은 '원유철'이라는 러닝메이트를 놓쳤기 때문이라는게 새누리당 내의 정설이다. 
 
최연소 도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50대 초입에 벌써 4선의 경력을 갖춘 원의원은 '젊은' 나이 탓에 선수에 비해 정치적 중량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정책위의장 당선으로 집권여당의 정책과제를 진두지휘하며 여권 내 '대형 우량주'로 자리매김했다. 

[키워드①→최연소 도의원]
원 의원은 1991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의원에 역대 최연소(당시 28세)로 당선됐다. 대학 졸업 후 잘 다니던 LG화학을 뛰쳐나와 무소속으로 거둔 승리였다. 지역구인 평택시 국회의원을 찾아가 "선배님들이 많아 공천 달라고는 못하겠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니 방해는 하지 말아 달라"고 읍소할 정도로 패기를 지닌 젊은이를 막아설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뻘 되는 의원들 틈 속에서 원 의원은 도정활동을 시작했다. 친구 아버지가 의회 동료인 경우도 있어 술도 많이 마셨다. 경험이 부족했던 원 의원은 젊음을 무기로 활동했다. 동료 의원은 "젊은 친구가 밀어붙이는 게 아주 황소야"라고 혀를 내둘렀다.

원 의원은 15대 총선에서 황소 같은 면모를 다시 보여줬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에서 탈락한 그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공천 탈락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사무실로 모여든 비디오대여협회, 중화요리협회, 세탁소협회, 택시협회 등 서민조직 지지자들이 그에게 '출마'를 외쳤다. 그는 이번에도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지난 2월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정책위의장에 당선된 원유철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뉴스1

[키워드②→추진력]
6월항쟁 열기가 거리를 뒤덮은 1987년, 원 의원은 정치외교학과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4학년이었던 그는 지도교수에게 "저는 학자가 아니라 현실정치를 하려고 정외과에 온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에 직접 참여해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교수 입장에서는 학생이 수업에 나오지 않겠다는 당돌한 얘기였다.  

지도교수는 "성적은 자네가 지지하는 후보가 승리하면 A를, 패배하면 B를 주겠다"며 원 의원의 결심을 흔쾌히 수용했다. 원 의원은 수업 대신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 캠프에 합류했다. 원 의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김영삼 후보가 져도 남는 장사였다, 이전 성적은 대부분 C, D였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아내인 서세레나씨도 그렇게 만났다. 1982년 1월, 대학에 갓 합격한 그는 서울 종로서적 앞에서 마주쳐 첫눈에 반한 그에게 무작정 대쉬했고, 대학졸업 후 결혼에 골인했다. 
지난 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 과정에서 유승민 의원이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정책위의장 출마를 선언하는 원유철 의원의 기자회견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뉴스1

[연관검색어→정책위의장]
정치인의 '로얄 로드'는 재선에 상임위원회 간사, 3선에 상임위원장, 4선에 원내대표 등 주요 당직을 맡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원내대표 경선은 원 의원이 자신의 역량을 입증할 시험대였다. 

원 의원은 4번의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큰 선거에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2012년 당 대표를 뽑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 출마했으나 최고위원에도 당선되지 못했다. 2014년에는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했지만 당 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결정적 한 방'을 못 날린 것이다.

 

정책위의장 당선으로 상황은 반전했다. 정책위의장 임명장을 받으며 원 의원에겐 집권여당의 주요 정책을 추진하고 야당과의 쟁점 법안 전투를 이끌 지휘봉이 부여됐다. 그는 정책 부문을 대폭 강화했다. 분야별로 묶였던 6개의 정책조정위원회 체제를 15개 상임위원회 중심으로 새로 꾸렸다. 6명이었던 참모진을 15명으로 증원한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정책위의장실에 밤늦게까지 남아 '열공'하며 '레벨업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에 20대 총선을 1년 앞둔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일자리 확충·저성장 및 저출산 대책 등 핵심과제들이 정책 총괄자인 그의 손에 맡겨졌다.

[이 한 장의 사진]
1996년 8월 15대 초재선 의원 연구모임인 '통일대비의원연구모임' 회원들이 백두산 등정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왼쪽에서 네 번째),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장(맨 오른쪽)이 원유철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함께 있다./사진제공=원유철 의원실

통일·외교·국방 전문가인 원 의원은 15대 국회 입성 후 여야 초재선 의원들과 함께 '통일대비의원연구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남북 통일 문제, 독일 통일 사례, 조선족 동포 사회와의 교류 방안 등을 공부했다. 사진 속에는 15대 국회에 같이 입성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왼쪽에서 네 번째),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장(맨 오른쪽)이 원 의원(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함께 있다. 

통일에 대한 소신은 19대 국회까지 이어져 원 의원은 현재 '통일을 여는 국회의원 모임' 대표를 맡고 있다. 원 의원은 새누리당이 통일 문제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자는 취지에서 소속 의원 31명과 함께 이 단체를 만들었다. 원 의원은 "'통일 대박'의 초석을 다지는데 정책위의장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표 법안→재외국민 보호 법안]
재외국민 선거에서 우편 투표를 허용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2012년 발의)이 대표법안이다.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7%에 불과한 재외국민 투표율을 올리기 위한 이 법안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다뤄질 계획이다. 

원 의원은 또 우리 국민이 외국으로 이주할 경우 주민등록이 자동 말소되는 제도를 없애고 해외 영주권자가 국내 입국 시 거소지를 신고하도록 한 제도도 폐지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이 두 법안은 모두 국회를 통과했다. 

원 의원은 2012년부터 2년 동안 당 재외국민위원장을 맡으며 재외국민 보호 활동에 본격 관심을 보였다. 그는 18대 대선 당시엔 헌정 사상 처음 치러진 재외국민 투표를 책임졌다. 결과는 새누리당의 패배였다. 총 16만 명의 재외국민 투표자 중 박근혜 후보는 7만 표를 얻어 9만 표를 얻은 문재인 후보에게 졌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에게 얼굴이 안서는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박대통령 당선자를 만난 자리에서 "재외국민위원장으로서 열심히 뛰었지만 졌다, 하지만 (지역구인) 평택에서 새누리당이 3만 표 차이로 이겨 결과적으로 제가 1만표를 더 가져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박 대통령 당선자도 깔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주목! 이 영상]  
원 의원은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그는 도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경기도와 함께 춤을' 이라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경기도 구석구석을 돌며 '관광버스 춤'을 추는 원 의원의 모습은 '4선'이 공짜로 얻어진게 아니라는걸 보여준다.

[요 주의! 정책 역량 입증, 정체성 논란]
28살에 정치에 뛰어든 원 의원은 정무 감각이나 조직 관리 능력이 뛰어난 반면 정책 능력에 대한 검증을 거칠 기회는 적었다. '정책통' 이미지가 선명한 유승민 원내대표와의 '시너지'를 넘어 자신만의 정책능력을 보여줘야 할 시기가 됐다.
잦은 이적은 원 의원이 지우고 싶은 꼬리표다. 그는 1996년 총선에서 무소속 당선 직후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1997년 대선에선 신한국당을 탈당해 이인제 후보와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1998년엔 국민신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가 합당하며 국민회의에 합류해 재선에 성공한다. 그는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중도 포기하자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프로필]
△1962년(53세) △경기 평택 △수성고 △고려대 철학과·정치외교학과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 고위정책결정과정 △미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 △경기도의회 의원 △제15·16·18·19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부대변인 △경기도 정무부지사 △18대 국회 국방위원장 △19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국회 지방자치발전특별위원장 △새누리당 무상급식·무상보육 태스크포스(TF) 위원장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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