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보루' 우상호, 그가 말하는 "열사람의 한걸음"

[the300- 의원사용설명서] 전대협 출신 의원 우상호, '이념→생활정치' 전환을 말하다

이하늘 기자 l 2015.04.10 05:56

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지난 8일 통신비 인하를 위한 '파격적인' 법안이 국회에 접수됐다.
휴대폰 사용자들에게 매달 1만원 상당을 부담케 하는 이동통신 기본요금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시민단체 등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친 적은 있지만 국회 입법과정에서 기본료 폐지가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법안을 발의한 이는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야당 간사를 맡고 있는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다.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우 의원은 대표적인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이다.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초대 부의장을 지낸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다.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직접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생활 입법'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것이라는 시각은 우의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 의원은  미방위 간사로서 통신비 관련 민생정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2만원대 무제한 통화 요금제'를 주창했다.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도 제기됐지만 우 의원은 해외사례와 국내 요금체계 분석을 통해 주장을 이어갔다. 그 결과 일부 이동통신사들이 최근 해당 요금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에는 20명 안팎의 동료의원들과 '가계통신비 인하를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고 회장을 맡아 관련 정책을 만들고 있다. 그 첫 결실이 이번에 발의한 기본료 폐지법이다. 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은 여전하다. 통신기업 뿐 아니라 통신요금을 담당하는 정부 관계자들도 우호적이지 않다.

이에 우 의원은 "통신요금을 담당하는 정부 공무원들이 가계통신 부담보다는 통신사의 수익에 대한 걱정이 더 많은 것 같다"며 "공무원은 기업이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며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표적 운동권 출신인 우의원이 생활정치에 집중하는 것은 그의 대학시절 경험과 연관됐다. 우 의원은 밖으로는 민주화를 외치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민주적인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운동권 사회에 비판적이었다. 일반 학생들과는 괴리된 운동권 일부의 과격한 주장과 표현에 동의할 수 없어 비운동권으로 지냈다.

운동권으로 전향한 것은 군 제대 이후다. 육군 병장이었던 1985년 2.12 선거에서 중대장이 사병들에게 여당인 민정당을 찍을 것을 압박하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적 문제에 눈을 떴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사진= 뉴스1


우 의원은 "당시 병장이었고, 곧 제대를 앞뒀기 때문에 민정당 후보를 찍지 않았지만 많은 후임들이 중대장의 압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며 "나 혼자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 소극적인 반대를 넘어 이같은 범죄적 행위에 참여할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복학생 신분으로 늦깎이 운동권이 된 그는 운동권에 대한 일반 학생들의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일부 운동권이 아닌 전체 학생과 일반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목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과정과 수단이 중요하다"며 "6월항쟁 역시 일반 시민들의 동의와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회에서도 이 같은 생각은 마찬가지다. 19대 국회 후반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야당 간사인 우 의원은 전반기 '식물 상임위' 오명을 얻었던 미방위가 후반기 '일하는 상임위'로 전환하는데 역할을 했다. 이념이 아닌 생활정치에 무게를 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 당장은 답답하고 더뎌 보이겠지만 이는 우리 사회와 정치를 발전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우 의원은 '열 사람의 한 걸음'을 항상 다짐한다. 그는 "우리 당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온전히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가치를 공유하는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며 "아울러 대화와 타협을 통해 반대편에 있는 진영 역시 설득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우리 사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키워드->전대협]

'전대협', '486(현재 40대후반~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은 우 의원의 정치인생을 논하는데 빠질 수 없는 키워드다. 한때 486(당시 386)은 기존 계파 중심 보스정치를 타파하는 새로운 정치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들에 대한 정치권,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박하다. 이미 486들이 기득권이 돼 자신들의 자리 지키기에만 매달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 의원은 "486이 그들의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느냐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각 대학 학생회장 출신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앞에 나서지 말고 봉사하자는 공감대가 있었고 지난 10년 동안 세대교체를 들고 나서며 선배 정치인들과 각을 세우기보다는 참모역할에 중심을 뒀다"고 설명했다.

"486들은 여전히 정치권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진보적 해법 고민을 그대로 갖고 있고 경제민주화, 남북화해 등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실무적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지난 2월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486 출신 의원들이 우리 당과 사회의 개혁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이를 지켜보고 평가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대표법안->국제개발협력법 개정안]

우 의원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이었던 지난해 2월 국제개발협력법 개정안을 발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조치를 강화했다.

기존 국제개발협력법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적극적조치 관련 조항이 없어 한국의 공적개발 원조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고민이 녹아들지 못했다. 장애인 배려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해당 사업진행 과정에서 장애인에 대한 배려조치가 충분이 이뤄졌고, 국제사회의 인정도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을 통해 남북관계 악화로 인해 피해를 입는 남북경협 관련 기업들을 지원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우 의원은 지난해 한 언론이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한 '국민이 뽑는 드림내각'에서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동영·홍정욱 전 의원을 제치고 통일부장관에 뽑히기도 했다.

지난해 5월 미방위로 자리를 옮긴 이후 우 의원은 '가계통신비 인하'를 중심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기본료 폐지, 2만원대 무제한 요금제 등 대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우 의원은 "국회의원은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국민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첫번째 사명"이라며 "내년 4월까지 미방위 소속인만큼 통신비 인하와 방송공정성 확보,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한 정책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인간 우상호]

우 의원은 학창시절 시인을 꿈꿨다. 대학에서도 국문학 전공에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다. 6월항쟁 1년 전인 1986년에는 오월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받으며 예비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기형도 시인의 3년 후배로 종종 그의 묘소를 찾는다. 그는 자신의 자전에세이 '촌놈'에서도 각 목차별로 맨 앞에 자신의 자작시를 넣었다. 독재정권 시대가 없었다면 시인이 됐을 것이라는게 본인의 말이다.

[요주의!]

486이라는 상징성은 오히려 우 의원의 발목을 잡는 단점이 될 수 있다. 우 의원은 전대협 출신 의원 가운데 학번이 가장 높다. 자연스럽게 모임의 좌장 역할을 한다.

당내에서는 486 출신들이 쇄신 대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지난 2월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이인영 의원은 12.9%의 기대에 못 미치는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486 출신들의 지지를 받으며 사실상 단독 후보로 나서 세대교체와 쇄신을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당원과 일반 국민들의 반응은 486 인사들의 기대와 괴리가 있었다. 당내 한 초선 의원은 "16대, 17대 국회부터 정치권에 입문한 전대협 출신 선배 의원들은 더 이상 젊은 피도 아니고 그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매달리고 있다"며 "486세대 이후 오히려 우리 당은 젊고 참신한 인물 발굴이 여당에 비해 크게 미흡하다"고 꼬집었다.

전대협에서 대중간부를 맡았던 주요 대학 출신 의원들과 상대적으로 '음지에서 활약'하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의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 역시 향후 486들이 중심이 돼 한국 정치를 이끌어 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의 사람들→이인영, 조해진…그리고 이한열]
1987년 6월 항쟁 시위 현장에서 전대협 부의장이었던 우 의원(왼쪽)이 이한열 열사의 영상사진을 들고 애통해하고 있다. 진 오른쪽은 영화배우 우현. 우현은 현재 우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으며 현재까지 우 의원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 우상호 의원실 제공


이인영 의원은 우상호 의원과 항상 한 묶음으로 평가받는다. 전대협 태동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이 의원이 초기 의장을, 연세대 총학생회장인 우 의원은 부의장을 맡았다.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서도 우 의원은 자신의 보좌진들을 이인영 캠프에 파견을 보내며 지원했다. 우 의원 역시 당대표 경선에 나설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 의원이 경선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출마 생각을 접고 이 의원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 의원은 "우리 둘은 절대 경쟁사는 사이가 아니라 정치의 발전을 위해 항상 협력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조해진 새누리당 원내수석 부대표도 우 의원과 '연관 검색어'로 등장한다.
최근까지 미방위 여야 간사를 맡으며 두 의원은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과거에도 같은 시기에 각각 당 대변인을 맡으며 상대 당에 대한 공격과 정책대결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정제된 언어선택과 도를 넘지 않은 표현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다.

대학 후배였던 이한열 열사는 우 의원의 정치생활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마음을 다잡는 정신적 버팀목이다. 6월항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우 의원의 가슴에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의 지인들은 "우 의원은 사석에서 자주 '내 심장은 한열이의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한다"고 말했다.

학생 대표로 이한열 열사의 부검에 입회한 그는 이한열 열사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더욱 이를 악 물었다고 한다. 부검이 진행되는 동안 감정이 폭발했지만 진실규명을 위해 더욱 눈을 부릅떴다. 우 의원은 이후 이한열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지난해 7월에도 현직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27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프로필]

△1962년(53세) △강원 철원 △서울 용문고 △연세대 국문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동우회 회장△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제17·19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 대변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간사
/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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