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크라운'?…여전히 배 고픈 정우택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

진상현 기자 l 2015.05.08 05:36


# 지난 2011년 충청북도 청주시. 도청에 근무하는 A씨가 시내에서 택시를 탔다. 여느 때 처럼 행선지를 말한 뒤 뒷좌석에 등을 붙이려는 찰나 아무래도 택시 기사의 용모가 걸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만 같았다. 자세히 보니 지난해까지 충북 도청을 이끌던 정우택 전 충북지사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A씨는 문을 열고 뛰어내릴 뻔 했다.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010년 충북 도지사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택시 운전을 할 때 겪은 일화다. 정 의원은 2011년 7월부터 주말 마다 택시를 몰았다. 민심 속으로 파고 들어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이었다. 8개월간 택시 운전을 병행한 정 의원은 다음해인 2012년 4월 총선에서 3선 의원으로 원내에 복귀했다. 장관, 도지사, 국회의원 등 이른바 '트리플크라운'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이렇게 '기어서 다시 올라오는'데 일가견이 있다. (정치인들은 낙선했다가 재기에 성공하는 것으로 '기어서 다시 올라온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재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의미다) 정치 입문 후 지금까지 7번의 선거에서 3번이나 떨어지고 매번 다시 일어섰다. 정치에 대한 열망,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거물 정치인의 아들, 경제기획원 엘리트 관료 출신의 '경제통', 행정과 정책을 아우르는 역량과 경험, 3선 의원의 경륜, 게다가 악바리 근성까지. 날고 긴다는 고수들이 수두룩한 여의도 정가에서도 이렇게 다 갖춘 정치인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다. 집권 여당의 3선 의원에 최고위원을 지내고 국회 정무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여전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정치 모델이 된 아버지]

정 의원은 아버지로부터 정치를 꿈꾸고 배웠다. 정 의원의 선친은 정운갑 전 의원(1985년 작고)이다.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5년 11월 42세의 나이에 농림부 장관(13대)에 임명됐다. 4대 국회의원 총선(1958년)에서 고향인 충북 진천에서 당선된 이래 10대 국회까지 5선을 한 정계 거물이었다. 1979년 9월엔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를 당하자 총재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정 의원은 "아버지와는 40년 차이로 정치문제로 얘기할 상대는 못됐지만 정계의 유명인사들이 집에 와 아버지와 바둑을 두면서 서너 시간 이런 저런 정치 얘기하는 것을 듣곤 하는게 제일 재미있는 일중의 하나였다"고 말했다.

[뜻밖의 제안자는 셋째형]

"너 정치할 생각없냐?" 정 의원에게 정치 입문을 제안한 것은 뜻밖에도 당시 함께 경제기획원에 일하던 셋째형 정지택 두산중공업 부회장이었다.
서울 상대 동기인 정몽준 전 의원이 정 부회장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제안했는데 대신 동생을 추천한 것이다. 1991년 말 당시 정 전 의원의 아버지 정주영 현대 회장이 통일국민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었다. "형제가 함께 공무원을 하기 보다 한 사람은 정치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또 나보다 네가 정치감각이 있지 않느냐"는 게 형의 제안 이유였다. 정 의원은 고심끝에 잘나가던 경제기획원 공무원 생활을 접고 정치 입문을 결심한다. 5남2녀의 자식 가운데 한 명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정치가 행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여실히 깨달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정 의원은 "공무원 시절 애써서 자료를 만들어 가도 정치하시는 분이 나중에 보자하고, 그냥 던져 버리더라"고 회고했다.

[재수, 낙방, 낙선…]

탄탄대로를 달려왔을 것 같은 정 의원이지만 의외로 실패가 많았다. 그가 1999년 쓴 에세이집 한 챕터의 제목도 '실패를 통해 얻은 용기'다. 1972년에는 대입에 실패해 재수를 했고, 고시를 하면서도 낙방을 경험했다. 정계 입문 후 통일국민당 후보로 나섰던 1992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떨어졌다. 이후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2010년에는 충북지사 재선에도 실패했다.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험 부족이, 2004년엔 '탄핵 역풍'이, 2010년은 세종시 이전 문제가 각각 발목을 잡았다. 정 의원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실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사람들과 그들이 내게 준 가르침은 나의 실수와 실패 속에서 다가왔다. 나는 내 실패를 사랑한다. 실패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이 지난해 11월21일 영국 캠프리지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키워드 1-경제통]

정 의원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가 '경제통'이다. 1978년 행시(22회)에 합격해 경제기획원에서 12년을 근무, '경제 기초'를 탄탄하게 다졌다. 기획원 동기들 중에서도 승진이 가장 빠를 정도로 잘 나갔다. 정 의원이 1991년 기획원 법무담당관을 지냈는데 행시 동기인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년 뒤인 1998년 같은 자리에 발령을 받았을 정도다.
 
정계에 진출해서도 정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재선 후 자민련에서 4년간 정책위의장을 맡아 활약했고, 2001년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정책 경험을 쌓았다. 2006년엔 충북지사에 당선돼 '국회의원-장관-도지사'라는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경제-정책-행정을 아우르는 역량을 갖추게 된 셈이다.
 
현재 국회 정무위원장으로서도 법안 하나하나를 챙기는 등 정책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주고 있다. 정 의원은 "사무관 시절 대통령께 금융산업 선진화 방안을 차트로 만들어 보고하는 걸 봤는데 40년 지난 현재도 아직 금융산업이 낙후돼 있다"면서 "원래 금융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정무위원장으로 온 이상 뭔가 조금이라도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가고 싶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키워드 2-이완구]

얼마 전 불명예 퇴진한 이완구 전 총리와는 같은 성균관대(정 의원은 법학과, 이 전 총리는 행정학과) 출신이다. 행시(정 의원은 22회, 이 전 총리는 15회)로 경제기획원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고, 15대 국회에 원내에 진출해 16대, 19대까지 3선을 거친 것도 똑같다. 2006년에는 나란히 도지사(정 의원은 충북지사, 이 전 총리는 충남지사)에 당선됐고, 자민련 시절 김종필(JP) 총재의 총애를 받았던 것도 똑같다.
이렇게 비슷한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JP 후계자, 충청권 맹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 전 총리가 원내대표, 총리에 오르면 앞서 나가는 듯 했지만 최근 낙마하면서 자연스레 정 의원쪽으로 다시 스포트라이트가 옮겨가고 있다.

[키워드 3-박근혜]

정 의원은 자민련에서 정치를 시작해 전통적인 의미의 친박 핵심 그룹은 아니지만 '범친박'으로 분류된다. 그 배경에는 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자리하고 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해 당적이 없던 정 의원을 충북지사에 내보내기 위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영입한 사람이 박근혜 당시 당 대표였고, 정 의원과 박 대표를 연결해준 사람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김 전 실장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으로 부터 열린우리당으로 부터 영입 제의가왔다는 말을 듣고는 만류한 뒤 얼마되지 않아 박 대표와의 자리가 마련했다. 정 의원은 결국 2005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입당, 2006년 충북도지사 당선된다. 박 대통령은 당시 지방선거 충청지역 유세에 나서 "정우택 후보는 한나라당에서 충북 드림팀을 조직할 때 중심이 되는 사람으로 한나라당 인재영입 1호였다"면서 "한나라당이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다"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정우택의 사람들]

김종필= 정 의원의 정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JP다. 정 의원은 정치 입문은 통일국민당에서 했지만 자민련 소속으로 옮겨 첫 '배지'를 달았고 그 곳에서 정책위의장과 장관까지 했다. 정 의원은 최근 JP의 부인상 때는 5일장 중 하루를 뺀 나흘간 빈소를 지키기도 했다. 정 의원은 "한 번은 JP 자택에서 오후 2시에서 밤 10시까지 바둑을 열 두, 세판 둔 적도 있다"면서 "국회의원 초재선을 다 자민련에서 하면서 JP 영향을 받았고 자민련이 붕괴 되는 과정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이한동= 이한동 전 국무총리도 정 의원을 아꼈다. 자신의 자서전 한페이지를 정 의원 얘기로 채울 정도였다. DJP 공조가 깨지면서 해수부 장관을 그만 둘때도 총리직에 있던 이 전 총리가 정 의원에게 함께 더 내각에 있자고 따로 권유하기도 했다.

[이 한장의 사진]



12년간 함께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했던 셋째형 정지택 두산중공업 부회장과 찍은 어릴적 사진. 사진 앞이 정우택 의원, 뒤쪽이 정 부회장이다. 정 의원은 정 부회장의 권유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정우택법]

정 의원이 꼽은 대표 법안은 전반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발의해 본회의까지 통과한 ‘주택도시기금법’이다. 이 법은 100조원에 달하는 국민주택기금을 주택도시기금으로 개편해 융자 뿐 아니라 출자, 보증, 투·융자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도시재생사업에도 금융지원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기금의 용도를 확대하는 내용이다. 이전까지 국민주택기금은 용도가 주택건설, 공급 등 주택 융자에만 한정돼 있었다.

정 의원 정무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불릴만한 진짜 대표 법안을 낼 생각이다. 관심 분야는 원화의 국제화, 은행의 규제 완화 등이다. 정 의원은 "자본시장 육성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상반기 중에 한 두가지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충청대망론]

 그는 대권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는 정치인이다. 39살에 공직을 그만 두고 나올 때도 '한국의 존 F.케네디'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 꿈은 훨씬 더 구체화됐다. 이는 '충청대망론'과도 연결된다. 그동안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왔지만 충청도가 주도적으로 정권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 의원은 "충청이 후보를 내고 영남이나 호남 등 다른 지역과 뭉치면 얼마든지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면서 "95년 이른바 '핫바지론'이 불었을 때 충청이 대단한 결속력을 보인바 있다"고 말했다. 대망을 이룰 충청 출신 후보군에는 정 의원도 물론 포함된다. 정 의원은 "제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된다면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렇게 가기까지 국정운영 능력을 평상시에 개발해 나가는 자세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요주의!]

충청도 내에서도 소수인 충북을 지역기반으로 하고 있어 '큰 꿈'을 꾸기엔 지역적으로 불리한 편이다. 반듯한 외모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와 후배들이 어려워하는 경항도 있다는 있다는 평가다. 

[프로필]

△1953년 부산 △경기고 △성균관대 법학과 △미 하와이대(경제학박사) △행시(22회) △제15·16·19대(현) 국회의원 △자민련 정책위의장 △해양수산부 장관 △충북도지사 △새누리당 최고위원 △국회 정무위원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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