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식 의원이 조정하라" 與도 인정한 협상파트너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조정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황보람 기자 l 2015.05.06 08:07

편집자주 7일 치러지는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the300은 이종걸·조정식·최재성 후보의 사용설명서를 소개합니다. 이전에 보도된 김동철·설훈 의원 사용설명서를 포함, 5인후보의 사용설명서 종합기사는 '런치리포트'로 묶어 소개합니다.

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번 재보선에서 뼈아픈 패배를 했습니다. '야당, 이대로는 안된다'는 통렬한 질책도 들었습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당을 다시 세우고 혁신하기 위해 첫째 공정과 신뢰를 근간으로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하나되는 새정치연합이 강한 야당'입니다."

조정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52)의 원내대표 선거 출사표는 무너져 가는 새정치연합을 진단하고 추구해야할 가치를 제시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하나되는 야당'이라는 말에는 최근의 당내 '분열상'이 담겼다. 그가 내민 해결책은 '공정성'이다.

'공정과 소통의 리더십'은 흩어지는 당을 봉합하고 강한 야당으로 거듭날 그의 키워드다. 목표는 2017년 정권교체다.

그는 2012년 민주당 야권통합협상단장, 총선 공천심사위원과 지방선거 공천심사위원장, 2013년 조직강화특별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본 풍부한 경험이 있다.



원내대표 후보로서 '상생'의 가치를 내걸었지만 그 뒤엔 '투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도 들어있다. 18대 원내대변인 시절 4대강사업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을 'MB악법'으로 규정하고 헌정사상 최장기 본회의장 농성을 이끌었던 그다.

그래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발휘해 선명하게 투쟁하고 실리적으로 협상하겠다"는 말에는 '투쟁'이 두드러지게 읽힌다. '협상과 투쟁'을 모두 담은 그의 출사표가 어떻게 쓰일지 주목되는 이유다.

원내대표로서의 성패도 여기에 달렸다. 그의 행보를 돌아보면 실리적 협상보다는 투쟁의 역사가 두드러진다. 과거 '투쟁의 조정식'을 뛰어넘어 '상생의 조정식'을 입증할 때 그도, 새정치연합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학생 조정식 → 학생운동은 했지만 졸업도 했다]
어린시절 조정식은 수줍고 조용한 아이였다. 자연에서 뛰놀고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달에 착륙한 아폴로호를 보며 우주과학자를 꿈꿨고 커서는 건축가로 꿈이 바뀌었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그려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세상 밖에 눈을 뜬 건 '혜화동 로터리'에서였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고려대와 성균관대 학생들이 종로통을 향해 시위 행렬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왜?'라는 의문을 가진다. 10·26 사태 때는 아버지와 서울대를 다니던 형이 민주화의 가치를 두고 논쟁하는 것을 보며 마음에 요동이 온다. 어린 조정식도 그렇게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재수를 해 연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그는 '인간연구회'라는 서클에 별 생각없이 들어간다. '자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인간연구회는 1978년 '인간걱정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중앙정보부에서 "학생이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느냐"며 이름 개명을 요구받았을 만큼 유명한 학생운동 조직이었다.



조 의원은 인간연구회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금서를 나눠읽고 선배들과 술 한잔 하며 격론을 벌이는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학생운동 전면에 나선 것은 우연한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점심을 먹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 친구들과 앉아있던 그는 기습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뒤섞여 사복경찰에게 끌려간다. 난생 처음 경찰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은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훈방된다.

하지만 알고 지내던 선배 다섯은 시국 관련 유인물을 뿌린 혐의로 구속됐다.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그가 진지하게 학생운동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된다.

학생운동 선봉장에 처음 서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1985년 4월 그는 신학기를 맞아 친구들과 대대적인 투쟁을 계획한다. 하지만 시위 며칠 전 투쟁을 주동하기로 한 친구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구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시위에 단순히 참여하는 것과 '주동'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시위 주동은 곧 구속과 대학 제적을 뜻했다.



그가 머뭇거렸던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중도 포기했던 아버지는 "대학은 꼭 졸업해야 된다"는 말씀을 거듭 하셨다. 그가 학생운동에 온 몸을 던지지 못한 이유일 지 모른다. 그는 결국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주동자로 나서게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투신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끝까지 방황했다. 그는 구속 대신 군대를 택했고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동지들과는 연락을 끊으며 군대에서 빌미를 잡힐 일도 하지 않았다. 결국 대학생 조정식은 아버지의 뜻대로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뉴스1

[진짜 투쟁은 생활 속에…프레스공 조정식]

그의 투쟁은 오히려 대학 졸업 후 본격화된다. 그는 취업 대신 노동현장을 향하므로서 생활 속 투쟁을 선택한다.


대학 졸업장은 걸림돌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생산직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기술 없는 초보자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기계 등의 원판을 찍어내는 프레스공으로 공장에 들어갔다. 6개월만에 그런대로 능숙해 질 수 있었다.

프레스 공장은 2교대나 3교대로 돌아가며 기계를 굴렸다.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 동료들은 안전장갑 없이 프레스를 찍었고 손가락 잘리기가 다반사였다. 그들은 이를 큰 사고를 막은 '액땜'이라 여겼다. 조 의원도 수차례 손가락이 절단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가난하지만 인간적인 동료들 속에서 그는 노동자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뼈속까지 노동자일 수 없었다. 대학 졸업자라는 신분이 들통날까 결혼식에 공장 동료들도 부르지도 못했다. 그 자리는 대학 선후배들이 채웠다.

노동자의 삶 4년차, 이때 '정치인 조정식'으로서 눈뜨는 사건이 발생한다. 1990년 2월 9일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민주당, 공화당 등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것. 그에겐 국민이 선택한 '전제와 균형'이라는 의회구조를 몇몇 정치인이 야욕으로 깨버린 '반민주야합'일 뿐이었다.

[더러운 정치의 걸레질, 제정구 의원을 만나다]
정치인 조정식으로서의 첫 시작은 '꼬마 민주당'의 당무기획실 전문위원을 맡으면서부터였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대학 선배가 물려준 자리었다. 나이 서른 무렵. 당의 정책과 국회 대책, 대변인 논평까지 담당하는 싱크탱크 자리였다. 그의 보고서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됐다.

민주당은 DJ를 14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했다. 당시 조 의원은 민주당 청년특별위원장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물결청년단'에 합류한다. 그 자리에서 향후 정치인생의 스승이 될 제정구 선생을 만난다.



"부정한 돈을 절대 받지 않으며 모든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 경조사에 화환을 보내지 않을 것이며 고급 승용차도 타지 않겠다. 또한 국회 회기 중에는 주례도 서지 않겠다"

제 선생은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한 한국 빈민운동의 대부로 '깨끗한 정치선언'을 주도하면서 14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걸레론'을 내세우며 더러운 정치판을 닦고 쓸겠다고 했다. 조 의원은 제 선생을 보며 그의 길을 따라가기로 다짐한다.



["조정식한테 조정하라고 해"]
국회에서 조 의원은 상대당으로부터도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지난 18대 국회 말 산업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대형마트의 영업규제 관련 법안심의를 하던 때 일이다. 당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은 당내에서 소통이 어렵고 대화를 꺼리는 상대로 인식됐다.


그런 권 의원도 조 의원만은 카운터파트너로 인정했다고 한다. 대형마트 영업과 관련해 여야와 정부, 업계의 이견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 권 의원이 찾은 사람도 조 의원이었다.


"조정식 의원 어디갔어? 빨리와서 조정하고 정리하라고 해."

19대 국회에서도 조 의원의 '조정'은 계속됐다.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세법을 심의할 때 일이다. 기재부 차관 출신인 김광림 새누리당 의원이나 유성걸 의원도 조 의원이 자리를 비우면 "조정식 의원님 빨리 모시고 오세요. 조 의원이 자리를 비우니 진도가 안나가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 의원이 "근거없는 패기나 불안한 판단력은 오히려 당을 더 큰 위기로 몰고갈 수 있다"며 "여당과의 협상과 조정능력을 갖추는 게 원내대표로서 중요한 덕목이 된다"고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다.


조 의원의 협상력은 같은 당 내부에서도 유효하다. 2013년 기재위 조세소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주장을 달리하던 당내 의원들까지 설득시킬만큼 뚝심도 있다.


당시 세법 개정안 가운데는 중소·중견기업의 기업상속을 돕기 위한 '상속세법 개정안'이 있었다. 기업상속공제 적용 대상을 매출액 2000억원 이하에서 3000억원 미만으로 상향해 적용대상을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당 내부에서는 기업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 뚜렷했다. 하지만 조 의원은 지역구에서 만난 기업인들의 고충을 토대로 창업주의 노회와 사망에 따른 가업승계의 문제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기업상속세를 내기 위해 멀쩡한 기업을 팔거나 생산시설과 부지를 매각해 일자리를 줄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조 의원은 국세청장과 국토부장관은 역임한 이용섭 전 의원에게도, 경제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홍종학 의원에게도 논리로 밀리지 않았다.


한달간 이어진 팽팽한 논쟁 끝에 결국 경제 전문가인 동료 의원들도 "조 의원 말대로 합시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대표법안]
조 의원이 발의한 대표법안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금융거래에서 재산을 숨기기 위해 차명계좌를 이용하거나 범죄수단으로 악용되는 대포통장 등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금융거래의 실질 명의를 사용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금융실명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한 이 법안은 조 의원안이 대안으로 반영됐다.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으로는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높이고 조세서비스를 강화하는 목적의 '국세청법'이 있다. 조 의원은 국세청이 그동안 국세행정이라는 본연의 업무 외에 국가권력의 하부조직으로서 정치적 의도와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세무조사를 진행하는 등 부정적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국세청의 기본조직 및 직무범위 등을 명확하게 제정함으로써 국세행정의 중립성과 전문성을 제고하려고 법안을 제출했지만 정부와 여당 및 국세청의 반발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주변엔]
그의 후원회장은 같은 당 소속인 원혜영 의원이다. 국회의원이 다른 의원의 후원회장은 맡는 일은 이례적이다. 원 의원은 그를 '합리적인 사람', '이야기가 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또 '대화와 타협으로 결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 의원이 차기 원내대표 후보로서 갖고 있는 최대 경쟁력을 설명해주는 평가다.



[이 한장의 사진]
1996년 민주당 당무기획실 전문위원이던 당시 조정식 의원이 제정구 전 의원과 회의를 열고 있다. 조 의원은 제 전 의원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정치적 스승이라고 말한다.

사진제공=조정식 새정치연합 의원실.


[요주의!]
차기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로서 위축된 당을 통합하고 이끌 철학이 명쾌하지 않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협상 상대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비해 철학이나 가치관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3선 의원이지만 그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나 영향력은 쌓지 못한 편. 

[프로필]
△동성고 △연세대 건축학과 △제정구 의원 정책보좌관 △17대 국회의원 △18대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변인 △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18대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19대 국회의원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그래픽=김지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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