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YS를 보내며…응답하라 1987

[the300]

김준형 기자 l 2015.11.22 18:35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 김 전 대통령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청년 세대들에게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도입부에 스쳐가는 장면으로 기억되는 198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

이날의 주인공은 노태우대통령이었다. 석달전 치러진 대선에서 2, 3위를 한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그 자리에 없었다. 차마 그 자리에 설 염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970~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삶에는 화면 속 노태우 보다는 화면 바깥의 YS와 DJ가 흑백사진 배경처럼 늘 자리 잡고 있었다.


36.6%의 지지율을 얻은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을 지켜보는 많은 국민들의 마음은 쓰라렸다.  '후보단일화'를 놓고 서로 YS냐 DJ냐를 다투며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들은 YS와 DJ가 그렇게 미울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테러를 당하고, 국회의원직을 빼앗기고,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해가며 대통령 직선제로 대표되는 이른바 '87년 체제'를 만들어냈지만, 그 결과물을 허무하게 '독재자의 친구'이자 '쿠데타의 주역'에게 헌납함으로써 그는 DJ와 함께 1987년 그렇게 국민들에게 큰 빚을 졌다.

 

이어진 3당 합당과 이를 통한 대통령 당선, 이후의 숱한 정치적 사건과 사고를 거쳐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정치를 이끈 그는 대통령 취임초 90%가 넘던 지지율을 모두 반납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존경받는 대통령 순위에서 그는 필생의 라이벌 DJ는 물론, 그를 핍박했던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자리를 내줘야 하는 인기없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재임기 혹은 생전의 인기와 역사적 평가가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민주화 투사' YS는 대통령 직선제와 다당체제로 대표되는 이른바 '87년 체제'를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5년뒤 기어코 권력을 쟁취해 당시 어느 정치인도 실행하기 힘들었던 두가지 개혁을 수행했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재평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김영삼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마자 열흘만에 전광석화처럼 군부내의 강력한 사조직이자 문민정치의 잠재적인 위협요인이던 '하나회'를 해체했다. 취임후 100일간 1000여명의 장교를 물갈이했다. 평생 매카시즘의 타깃이 돼 온 DJ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26세에 처음 국회에 발을 딛을 때부터 줄곧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이었던 그는 군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정치인중의 한명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 는 YS의 책사 황병태의 말은 결과적으로 '참'이 됐다.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를 처음으로 실시해 여론의 지지를 얻은 그는 그해 여름 또 하나의 메가톤급 개혁인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한다. 말로는 필요성을 외치면서도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기득권의 반발을 의식해 정치권이 실행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재임중 외환위기를 맞게 된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한국만의 위기가 아니었고, 위기의 원인이 된 금융 및 기업 부실화는 개발독재시대의 폐해가 곪아터진 것이라고 보면 그로서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다. 역사에 있어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이어 등장한 DJ의 소방수 역할을 감안해보면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지는 권력 바통터치는 정치적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대안 없는 순열이었다.

 

YS는 그렇게 국민에게 빚을 지고, 또 갚기도 하고 갔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나 그가 눈을 감는 지금도 서울 거리엔 여전히 경찰의 물대표와 시위대의 각목이 난무하고 있다. '정치인 김영삼'의 변곡점이 된 1987년의 숙제는 여전히 완결되지 않은 '진행형'인 셈이다.


30여년전 '상도동 막내'로 정치를 시작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빈소에서 상주 역을 맡고 나섰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3당 합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권의 많은 지도자들은 YS에게 정치적 성장의 빚을 지고 있다. 여권 뿐 아니라 YS가 정치에 입문시킨 고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주변의 인사들을 포함, 정치권 전체가 YS의 상속인이라는 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다.


YS가 온전히 풀지 못한 숙제, 혹은 갚지 못한 빚이 있다면 그 빚은 상속인들의 몫이다. YS가 기력이 남아 있을 당시 마지막 쓴 글귀는 그의 정치인생 트레이드마크였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아니라 '통합과 화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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