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비상시국 행' 각자도생

[the300]

서정아 정치부장 l 2016.09.26 05:50
 9월 12일 지진이 난 지역에서 야간자습 중이던 한 고등학교는 평소대로 교실에 앉아 공부를 하라고 지시했다. 부모들에게도 안심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다른 학교에선 학생들이 학교를 어떻게 믿냐며 삼삼오오 학교를 이탈해 집으로 갔다.

경북 경주시 남서쪽 8km 지역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12일 오후 일어난 가운데 경북 경주 동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아파트 밖으로 대피하고 있다.


둘 다 아수라장은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규칙도 없고, 규칙이 지켜지지도 않는 무질서상황. 2년 전 세월호침몰 사고에서 배운게 하나도 없다. 배가 반쯤 물에 잠겨있는 상태였던 방송뉴스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아이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 고등학생인 딸도 마찬가지다. ”‘가만 있으라’는 말만 듣고 있다가 죽었는데 학교 말을 어떻게 믿냐“고 되묻는다.

같은 날 저녁을 먹고 쉬던 부산의 지인 집에선 갑자기 건물이 요동치고 식탁 위 그릇들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태어나서 처음 겪은 광경에 놀라 TV를 켜니 예능프로그램에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전화통화도 문자도 카톡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또한번 흔들. 무서워서 집 밖을 나오니 다들 “누가 지진 나면 학교 운동장으로 가라더라”면서 10분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고 있었다.

9월 14일부터 이어진 추석 연휴. 이 지역에선 지진 얘기만 오갔다. 욕실로 가라 아니다 책상 밑에 숨어라, 재난문자가 언제 왔느냐 등이었다. 북한 핵실험도, 차기 대통령도 안중에 없었다. 내가 당장 끔찍한 경험을 했고, 이걸 나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는 불안감뿐이었다.

하나같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말한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국민안전처의 지진대피요령에 실망한 국민들은 일본에서 발행된 지진 매뉴얼 도쿄방재를 번역해서 나눠본다. 일본의 생존가방이 알려지면서 대형 마트에서 생존가방 필수품인 손전등이 순식간에 동났단다. 지진 얘길하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재난전담 조직인 국민안전처는 왜 존재하는가. 정부는 뭐하는가”

청와대도 지진사고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은 연일 지진과 북한 핵실험을 거론하며 비상시국을 언급한다.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의혹이 언론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나온 뒤 9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은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은 사회를 뒤흔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재수 농림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를 통과한 다음날인 24일에도 “나라가 위기에 놓여있는 이러한 비상시국에 해임건의안 형식적 요건도 갖추지 않은 농림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이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판단하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이를 정치적 이슈에 갖다댈 게 아니라 지진 대처 후속작업을 해나갈 정부 조직에 강조해야 한다. 국민안전처와 기상청 등은 업무시스템을 재정비해서 지진예측능력과 대응체계를 갖추도록 고삐를 죄야 한다. 늦었지만 한반도 지진위험지도를 구축하고, 원전시설도 재점검해야 한다. 1만 여명의 직원 중 지진전문가가 본부에 단 1명 있다는 국민안전처, 여진은 예측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상청이어선 안된다. 깊이 있는 전문 분야 정보제공보다 누리과정, 올바른 역사교과서 등 정부 전반의 정책 홍보에 할애하는 개별 정부기관의 홈페이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이들이 비상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각자도생을 가슴 깊이 새긴 국민들은 무력하기만 하다. 올여름 1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의 열차 승객들도 저마다 단단하게 각자도생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모두를 불신하고 나름의 생존책을 강구하며 불안에 질린 모습들. 그게 지금 우리들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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