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조기대선에서 불붙는 '재벌개혁' 공약

[the300]종합

김태은 김유진 이재원 기자, 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l 2017.01.13 09:19
재벌 개혁 너머 재벌 해체까지

그래픽=머니투데이

"재벌개혁은 식상한 말이 돼서 남은 구호는 재벌해체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난해 연말 야당의 경제통으로 통하는 국회의원이 고민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에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연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차기 대선에서는 ‘재벌개혁’ 이상의 강도 높은 공약들이 쏟아질 것이란 전망을 하면서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터지기 직전까지는 ‘경제민주화’ 수준에서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 근절, 대주주의 사익 추구 규제 등이 주내용이었다. 하지만 정경유착이 재연되면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으로 논의의 장이 번졌다. 특히 특정 대기업을 겨냥, 재벌 체제 해체 주장까지 나왔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지난 10일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재벌의 지배구조를 중점적으로 파고 든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은 금산분리 정책이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강하게 추진하다 참여정부 말기엔 오히려 기조를 완화해 ‘삼성 봐주기 비판’을 받은 정책이다. 금산분리가 엄격하게 적용되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하기 힘들게 된다. 삼성생명을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삼성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전 대표는 금융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에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계열사 간 자본출자를 자본적정성 규제에 반영해 사실상 출자총액을 제한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출자총액제한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막기 위한 취지로 폐지와 부활을 반복해왔다. 출자를 제한하게 되면 순환출자 구조를 통해 오너 지배력을 확보해왔던 대기업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집중투표제와 다중대표 소송제 등 대주주의 경영권 전횡을 견제하도록 하는 장치와 노동자추천이사제 등 주주가 아닌 근로자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사실상 재벌 오너의 기업 지배 체제를 해체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아예 "극단적인 조치를 통해 재벌기업을 재벌가문으로부터 분리시켜 지배권을 박탈해야 한다"며 '재벌체제 해체' 공론화에 나섰다. 기업 지배구조에 관해 문 전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해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대기업 불공정 행위에 대해 법정 최대 제재를 적용하고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배임죄를 적용하는 등 엄격한 처벌에 방점을 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안희정 충남지사 역시 공정 경쟁의 원칙에 따라 기울어진 경제 생태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며 재벌 개혁의 스탠스를 잡아가고 있다.

 

'삼성동물원'이란 표현으로 대기업 위주의 기업 생태계에 대해 주로 비판해왔던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 공동대표는 CJ와 롯데 등 대기업이 영화상영업과 배급업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경제검찰 수준으로 강화하는 등 대기업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 위주로 문제제기를 해왔다.


범여권에서도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재벌개혁 정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유승민 의원 측 핵심 관계자는 "오는 25일 대선 출마 공식 선언을 앞둗고 경제 분야, 그 중에서도 재벌개혁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공약과 메시지를 다듬고 있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출마 선언과 별개로 별도로 계속 메시지를 낼 계획"이라고 전했다. 유 의원 측은 신규 순환출자 뿐 아니라 기존 순환출자도 금지해 재벌의 기업 지배구조 정상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재벌해체보다 재벌에 집중된 경제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기업들이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공유적 시장경제 시스템'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IMF에서 시작된 재벌개혁,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재벌은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광복 직후 50년의 고속 성장을 대기업, 재벌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를 기점으로 재벌은 ‘주인공’이 아닌 '개혁'의 대상이 불려왔다.

 

한국 정부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IMF가 꼽은 한국 경제 위기 요인은 대기업(재벌)과 금융기관 부실 등이었다. 긴급 지원의 전제 조건으로 금융개혁과 자본자유화,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의 개혁프로그램 실행을 내걸었다. 그때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와 맞물렸다. 당시 후보들은 IMF의 개혁 프로그램과 대동소이한 재벌개혁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모두 계열사간 상호 지급 금지와 결합제무제표 의무화, 소액주주권 보호 등을 공약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벌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을 낮추고, 족벌 경영체제의 현대화를 위해 사외이사 비율을 의무화하는 등 재벌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30년이 걸려도 이를까 말까 한 재벌개혁이 IMF 사태로 가능해졌다"는 말을 남겼다.

 

IMF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뒤 치러진 2002년 대선에서 지지율 1·2위를 다퉜던 두 후보의 입장이 확연히 달랐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재벌개혁을 강하게 주창한 반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한국의 기업 여건이 후진국 수준이라며 '규제 해소'를 주장했다.

 

노무현 후보는 시장이 시장답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출자총액제한제 유지, 기업집단 지정제유지,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도입 등이 재벌 개혁 공약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출총제 완화 또는 폐지 노 후보와 정반대에 섰다. ‘재벌 개혁’을 주장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지만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친 재벌적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출자총액제한제 대상 기업집단 기준 상향 조정(5조원→10조원), '금융산업의구조개선에관한법률'(일명 금산법) 개정 유예 등이 좋은 예다.

 

2007년 대선에서는 기업인 출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금산분리 정책 완화, 출총제 폐지, 순환출자금지 반대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반면 정동영 민주당 후보는 재벌개혁 유지 입장을 보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친기업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눈에 띄게 가시화된 재벌 정책은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규제 완화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에선 재벌 개혁 대신 '경제 민주화'가 화두였다. 주요 대선 주자 모두 경제 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정도의 차이는 존재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부당내부거래 규제 등 주로 기존 제도를 유지하는 수준의 공약을 내세웠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기존 순환출자 해소, 2009년 법 개정 이전으로 금산분리 규제 복원 등 더 강력한 재벌개혁 정책을 제시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1997년 이후 재벌개혁 정책이 완화되거나 강화되면서 꾸준히 유지돼 왔지만 최순실 사태를 겪은 지금은 전보다 더 포괄적인 틀에서 재벌개혁을 논의해야 할 때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부터 '경제민주화'까지...재벌개혁 성과史



재벌 개혁의 바이블인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이하 공정거래법) 초안이 나온 게 1964년. 이 법은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1980년 12월 국무회의 문턱을 넘으며 시행된다. 하지만 △담합행위 규제 △독과점 방지 △공정거래위원회 신설 등을 통한 ‘재벌 개혁’보다 ‘재벌 길들이기’용으로 활용됐다.


본격적인 재벌개혁의 시작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다. 노태우 정부는 '재벌 경제력 집중 억제'를 명분으로 내걸고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다.


개정안에 따라 당시 자산 4000억원 이상이던 기업 32개를 대상을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이 기준에 해당하는 재벌들이 순자산액의 40%를 초과해 국내 회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도 함께 도입했다. 동일 계열사가 서로의 주식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한 상호출자금지제까지 도입되며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제한하는 성과를 거뒀다.


김영삼 정부도 집권 초기인 1993년 문어발식 확장 억제를 위해 30대 재벌이 그룹별로 주력 업종을 선정하면 이에 대해 출자규제와 은행대출규제에 예외를 허용해주는 '업종전문화제도'를 도입했다. 또 1994년에는 출총제 출자총액의 한도를 순자산의 40%에서 25%로 축소했다. 하지만 규제 완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업종전문화제도는 도입 2년만인 1995년 폐지됐다.


출총제 역시 소유분산 및 재무구조가 양호한 기업에 대해서는 출자총액 규제를 면제해 주는 등 예외 조항이 대거 추가됐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의 원인이 정경유착과 재벌의 무분별한 투자 때문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적을 수용하면서 2차 재벌개혁에 나선다.


정부는 △경영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해소 △재무구조 개선 △핵심역량강화 △책임경영제고라는 5대 원칙에 △제2금융원 경영지배구조개선 △순환출자 억제 및 부당내부거래차단 △변칙상속 및 증여방지라는 후속 보완대책을 더해 '5+3 재벌개혁'이라는 틀을 마련했다. 1998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일시적으로 폐지했던 출총제를 3년 만인 2001년 다시 시행했다. 이외에도 5대 재벌의 사업부문을 맞교환 하는 '빅딜', 30대 대기업 워크아웃 등 과감한 재벌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성과를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노무현 정부는 상호 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지주회사 도입과 재벌 소유구조 개선을 추진했다. 계열금융사 의결권 한도는 30%에서 15%로 줄였다. 반면 실제 출총제 출자한도를 종전 40%로 완화하고 대규모기업집단의 기준을 10조원으로 상향하는 등 규제 완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출총제를 폐지하며 친 기업 기조를 유지했다. 2008년 806개였던 30대 재벌의 계열사는 이명박정부 말기인 2012년 1220개까지 늘어났다.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정부 역시 재벌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박 대통령은 '경영진의 불법행위에 대한 집단소송제 도입',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재벌 지배구조 개선'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지만 집권 4년차인 지금까지 아무 진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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