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민주주의, 참 어렵다

[the300]

박재범 정치부장 l 2017.08.22 04:30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무미건조했다. ‘3무(사전질문‧원고‧편집 없는) 회견’이라고 할 때 이미 예견됐던 바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다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탄탄한 각본, 치밀한 연출이 재미의 보증 수표다. 지금까지 문 대통령의 행사가 이랬다. 탁월한(?) 주연 배우도 한몫했다.

반면 회견, 토론은 다르다. 문 대통령의 애드립(즉흥 발언)은 강하지 않다.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준비된’ 대통령답게 준비된 대로 간다. 스타일로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반대다. 노 전 대통령의 돌발 발언을 문 대통령에게서 기대할 순 없다. 참여정부 출신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에겐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문 대통령에겐 해 달라고 건의하는 게 많다”고 했다.

‘3무 회견’을 기획한 참모들의 걱정이 크지 않았던 이유다. 회견에서 돌발 변수는 돌발 답변과 돌발 질문뿐이다. 전자는 발생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후자는 주최측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기자회견은 예상 범주 내에서 흘러갔다. 역시 돌발은 없었다. 주제 자체도 예상 가능했다. 북핵, 한반도 문제는 수십번 되풀이됐던 내용이다. 증세와 부동산 문제도 그렇다.

지난 20일 열린 ‘국민인수위원회 대국민 보고회’도 비슷했다. 다만 막바지 ‘소통’에 대한 답변 중 솔직한 심경이 묻어났다.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발언이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은 주권자로서 정치를 구경만 하다가 선거 때 한표를 행사해왔다. 그렇기에 우리 정치가 낙후됐다고 국민들이 생각한다. 간접민주주의로 만족을 못 한다”는 설명도 붙였다.

‘촛불’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한 참모는 정부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 ‘촛불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 무의미하다는 전제였다. 이념보다 철저히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도 깔려 있다. 민심을 따르는 게 정치의 기본일 수 있다. 다른 참모도 “(현 정권의) 부채 의식은 촛불에만 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국민주권으로 부른다. 지난 100일, 이 힘으로 ‘닥공(닥치고 공격)’했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속도에 우려를 표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비정규직, 탈원전, 증세 등을 쏟아냈다. 촛불의 환호와 박수 속 ‘의제 설정(아젠다 세팅)’은 마무리했다. 직접 민주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현 정부는 의제 설정에 이어 공론을 통한 문제 풀이를 꾀한다. 탈원전 관련 공론화위원회가 좋은 예다. 문 대통령은 “공론조사 과정을 통해 합리적 결정으로 얻어낼 수 있다면 유사한 많은 갈등 사안에 대해서도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중요한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접 민주주의의 진화 버전이다.

여기서 “국회가 바로 공론의 장”이라는 시각과 부닥친다. 청와대가 의제 설정에 성공한 만큼 문제풀이는 국회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지지율 80%와 국회 의석수간 괴리, ‘취임 100일’과 ‘100일 이후’를 보는 시각차 존재한다. 거대담론으로 보면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대결이기도 하다.

정답은 없다. “21세기 민주주의 시대는 누가 결정하는 가의 문제로 신뢰가 결정되지 않는다. 직접 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 어느 쪽도 선과 정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김진한, 헌법을 쓰는 시간).

다만 직접 민주주의 요구가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대의 민주주의 엘리트(정치인)에 대한 불신도 크다. 반대로 직접 민주주의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기억에 남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신하다. 간언하고 소신에 따라 일하는 게 올바른 신하가 아닌가. 민심을 과감히 거역할 수 있어야 한다.” 민심을 따르는 것도, 거역하는 것도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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