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 배려가 공존하는 사회로

[the300][워킹맘 좌충우돌](7)

이윤진 사회복지학 박사(육아정책연구소) l 2017.09.28 16:02
얼마전 일이다. 황리단길이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머릿속에 저장을 해 둔 후 여행 둘째 날 아침이 되자마자 부랴부랴 황리단길로 향했다. 대릉원 옆에 수많은 허름한 가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있었다. 남들보다는 조금 더 경주에 대해 안다고 자부했던 나로서는 몇 년 사이 변한 가게 풍경에 입이 안 다물어질 지경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첫 번째 가게 앞에 다다르자 제일 먼저 보이는 문구, “No Kids Zone”(노키즈존). '그래, 애 데리고 오는 사람 말고도 받을 손님이 많겠지' 싶어서 이해하고 2순위 가게로 향했다. 다행히 표지판 앞에서 거절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어가니 종업원이 하는 말, “저희 집엔 애기들 먹을 음식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우리 집에서 나가라 말라가 아니라, 죄송하다고 한다. 오히려 더 할 말이 없었다.

음식점은 개인의 주거지과 같은 개념을 가지는 장소로, 주인은 원치 않은 손님을 받지 않을 권리를 당연히 가진다. 이에 반박하여 손님이 난동(?)을 부릴 경우에는 형법상 주거침입죄에 해당하게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지 말라는 주인의 의사표시를 존중해줘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주인의 주거권과 영업권 등을 이유로 ‘맛집’과 ‘핫 플레이스’를 방문할 기회를 박탈 당하고 말았다. 애기와 동행한다는 이유로. 

인터넷에서 노키즈존 이야기를 수 없이 봐왔지만 직접 당하고 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급히 아이와 동행했던 음식점들을 돌이켜 보았다. 아이와 함께 카페를 갔던 적을 돌이켜보니 까마득한 과거였다. 아이와 함께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점을 간 것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혹여 대중들이 많이 가는 커피숍을 방문하면서도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아이에게 동영상을 틀어주거나, 물이라도 엎으면 휴지를 가져다가 조용히 바닥을 닦곤 했다. 종업원에게 미안해서라기보다 ‘아이 데리고 온 엄마인 여자’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일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이 아이와 함께 당당하게 음식점을 들어가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으리라 짐작한다.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시작하고부터 사회가 원망스러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기 의자가 있는지, 수유실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기저귀 가는 곳이 마땅한지, 아이가 떠들어도 되는지 체크 후에 음식점 나들이를 나간다. 

왜 유모차를 보관하는 장소가 모든 음식점에 넉넉지 않은지, 왜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장소가 없는지, 왜 아기 의자는 부족한건지, 왜 아기 식기는 구비되어 있지 않은지. 이러한 작은 배려가 '그래도 아이 키울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건데'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면 무한대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음식점 업주의 마음 또한 이해 간다. 오죽했으면 손님을 거부할까 싶어서이다.

문제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이 죄냐고 반문하지 말자. 아이와 함께 한다면 조금 더 세심하게 내 아이와 주변 환경을 함께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 아이가 주변 상황을 개의치 않고 떠들거나 주변 사람들의 식사 시간을 방해할 정도라면 엄마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물론 업주 또한 배려가 필요하다. 아이가 방문할 수 있을 정도의 카페나 음식점이라면 노키즈존을 내세우기 전에 아이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자. 한 두 명의 아이가 방문하더라도 그 부모가 편안히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약간의 배려 말이다.

며칠 전 모 어린이집에 방문했다가 크게 감동 받을 일이 있다. 그 어린이집에는 장애를 가진 학부모가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하여 성인 장애 전용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개원 이래 단 한 명도 그 화장실을 사용한 학부모는 없었다고 한다. 그 어린이집은 개원한 지 이제 15년이 넘어간다. 상대에 대한 배려, 서로에 대한 배려, 모두 함께 사는 사회를 사회 구성원이 인지하고 실천하고자 애쓸 때, 함께 사는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윤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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