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장관의 '들러리 구하기'

[the300]

박재범 기자 l 2017.10.11 04:31

#대한민국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대략 9000개 안팎이다. 많게는 1만개 남짓으로도 본다. 대한민국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정부조직법에 따르면 △내각 △헌법기관 △공공기관 △특정직(검찰·경찰고위직 등)의 임면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한다. 이 권한을 청와대가 직접 챙기기 시작한 것은 참여정부 때다. 그 전까지는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더라도 ‘실질적’ 인사권은 장관에게 위임했다. 주도권은 장관이 쥐고 청와대가 필요할 때 입장을 반영시키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청와대가 주도한다.

명분은 언제나 좋다. 주먹구구식 인사 대신 체계적 인사를 하자는 취지였다. 일선의 ‘인사 청탁’ 등을 막는 부차적 효과도 내세웠다. 청와대에 인사수석, 인사비서관을 뒀고 정부 내에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인사 데이터베이스(DB) 구축도 했다. 공공기관장은 공모로 뽑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투명한 절차, 공정한 경쟁을 내세웠다. ‘무늬만 공모’ ‘사실상 낙하산’ 등의 논란이 이어졌지만 틀은 변하지 않았다.

참여정부 인사 시스템을 비판했던 야당도 정권을 잡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이를 즐겼다. MB정부나 박근혜 정부나 다르지 않았다. 손에 쥔 달콤한 사탕을 굳이 내려놓을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논공행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카드였다.

#“도대체 누가 하는 거야?” 현 정부 출범 후 인사 관전평을 쏟아내다 보면 막바지에 이 질문이 나온다. 그리곤 대화가 끝난다. 과거처럼 ‘밀실 인사’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측면에선 분명 긍정적이다. 반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무책임’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최근 일부 공공기관장 공모 절차를 둘러싼 혼선이 대표적이다. 인사권을 청와대가 쥐고 있는 것을 다 아는데 ‘주무 부처’나 ‘공모 절차’ 뒤에 조용히 숨는다.

전직 장관은 옛 경험을 들려줬다. ‘들러리 구하기’라는 씁쓸한(?) 표현으로 현재의 모순을 꼬집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산하 공공기관의 공모가 시작되면 부처 장관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들러리 찾기’다. 유효 경쟁을 성사시키는 게 당면 과제다. 뽑을 사람은 청와대가 찍고 들러리는 장관이 찾는 ‘웃픈’ 모양새다. 장관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기는커녕 ‘들러리 구인권’을 준 셈이다. 다른 장관도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 분야에서 30년가량 뛰었던 선수들이다. 그들에게 들러리를 권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인사권’을 쥔 쪽은 현 제도가 편할 거다. 책임론도 비켜갈 수 있다. ‘권한’을 행사하면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최고의 패다. 생색은 내고 들러리 찾기는 넘길 수 있다. 반대로 왜곡은 심화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사를 누가 하는 것이냐’는 질문은 사라지고 실제 줄을 찾아 헤매는 현상이 나타난다. 부처 장관은 허수아비 취급을 받는다. 청와대는 강력한 정책 추진과 집행을 각 부처에 주문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청와대 앞의 줄이 길어질수록 부처 장관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운용이다. 과거 인사 청탁이 적폐였다면 지금은 시스템의 모순이 드러나는 시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5개월 동안 청와대가 발표한 인사는 120명 남짓. 청와대 실장 수석급 21명, 장차관급 87명이 대부분이다. 가뜩이나 인수위원회없이 출범한 정부여서 속도가 더딘데 공공기관장 등까지 챙기려니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인사를 둘러싼 조용한 잡음도 계속될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다. 차라리 인사권과 들러리 구하기 권한을 몰아주던지….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