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다시보는 남북 정상회담

[the300]종합

김성휘, 서동욱, 최경민 기자,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l 2018.02.20 09:47
공존·번영 손맞잡은 남북정상회담, 세번째 화두는 북핵

'김일성과 아스피린'
2000년 6월14일 평양. 김대중 대통령과 마주앉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 경위를 말했다. 김일성은 사망(1994년) 몇 해 전 심장 쇼크를 일으켰다. 그때 소련에서 가져온 페이스메이커(인공심박자극기)를 몸에 달았다. 이 기기를 쓰면 혈액응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혈액을 묽게 하는 약이 아스피린이다.

김정일은 "서방세계에선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중국도 개혁개방 이후 아스피린을 복용한다는데 당시 소련 의료진은 아스피린을 권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제 페이스메이커가 소련제보다 낫다는 점도 말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더 넓은 세계를 내다봐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이 쓴 '피스메이커' 한 대목이다. 임 전 장관은 "놀랍게도 '폐쇄사회의 폐해'를 시인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내밀한 이야기를 한 김정일의 의도가 무엇이든 정상회담을 통해서야 듣게 된 북한 내부의 고민이다.

두차례 남북정상회담은 이렇게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서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곤 했다.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서 적잖은 숙제도 남겼다.



2000년 회담은 글자그대로 역사적이었다. 남북에 각자 정부가 수립된 후 첫 정상회담이었다. 남북 정상이, 그것도 평양에서 악수하며 회담하는 장면 자체가 패러다임의 획기적 전환을 상징했다. 아스피린 일화에서 보듯 남북이 서로의 속내를 들어봤다는 의미도 있다. 6·15 공동선언은 남북의 통일방안에 공통점을 찾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산가족 교환방문, 교류확대도 약속했다.

북한은 남쪽을 포격할 수 있던 군사기지 개성을 공단 용지로 내놨다. 해군항이던 장전항도 금강산 관광용으로 개방했다. 우리측은 경의선-동해선 철도와 도로 등을 연결하기로 했다. 노무현정부로 넘어가긴 했지만 2003년 개성공단 1단계 개발에 착공했고 2004년 첫 제품이 생산됐다. 

2007년 2차 정상회담은 '공존'을 넘어 함께 '번영'하자는 쪽으로 한걸음 전진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노란 군사분계선을 밟고 육로로 평양을 향하는 장면이 이를 보여줬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비서실장으로, 회담준비 책임자였다. 남북 합의내용은 1차 회담 성과를 확대, 구체화한 게 많다. 서해 NLL은 그대로 두되 그주변에 같은 면적으로 공동어로 구역을 만들기로 했다. 남북관계를 안보에서 경제로 바꾼다는 대담한 구상이 실현되는 듯했다.

김대중정부는 임기중 정치·경제·군사 등 60차례 남북대화를 열면서 햇볕정책을 고수했다. 노무현정부에서도 남북교류는 늘어났다. 그러나 두차례 정상회담은 미완의 성과로 남았다. 1차 정상회담의 경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합의는 우리로선 북한 안보위협을 현저히 낮추는 효과를 가졌다. 대신 북한 영역에 우리 국민이 들어가야 한다는 리스크를 안았는데, 이게 끝내 불씨가 됐다. 2008년 금강산 관광을 갔던 박왕자씨 피살사건 후 금강산 관광이 막혔다. 

2015년엔 북한의 연이은 도발 끝에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각각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악화된 측면도 있다. 서해 NLL은 대선판을 뒤흔드는 안보 쟁점이 됐다. 김대중정부 시절에 대한 대북송금 특검도 국내에 정치적 파장을 안겼다.

문 대통령이 추진하는 3차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5년임기 중 3년차에 성사된 2000년 1차회담과 비슷하다. 임기내내 정책적 노력이 이어진다면 성과도 볼 전망이다. 2007년 2차 회담은 정권말, 12월 대선이 임박한 10월에야 성사됐고 그나마 정권이 바뀌어 후속조치 이행이 막혔다.

반면 회담에 임하는 정부입장은 '우선 만나고, 만나야 이야기한다'는 김대중정부보다는 '북핵 해결과 관계 진전에 도움이 돼야 만난다'는 노무현정부와 비슷하다. 무엇보다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것은 1·2차 회담과 질적으로 다른 조건을 형성했다. 만남을 위한 만남은 안 된다는 게 문 대통령 생각이다. 한반도 주변정세도 변수다. 남북 대화는 미국 일본 등 전통적 우방의 신뢰를 흔들지 않아야 하는 고난도의 외교방정식이다.




결빙·해빙 반복···남북 '회담사'의 주역들



올해로 남북 분단 73년. 그 기간 동안 남북은 두 차례 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조성 등 결빙과 해빙의 시기를 이어왔다. 정상회담을 비롯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던 남북 간 중요 합의 뒤에는 수많은 회담 일꾼의 노력이 있었다.


남북회담사에서 대북 밀사의 시초로 꼽히는 사람은 박정희 정부 시절 '7·4남북공동성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이 전 부장은 당시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이른바 '이-박 라인'을 형성해 수차례 북한을 드나들었다.


5공화국 정부에선 장세동 안기부장이 허담 북한 노동당 비서와 '장-허 라인'을 구축, 밀사외교를 맡았다. 6공화국에선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대북 밀사역으로 활동했다.


분단 이후 첫 정상간 만남이 성사된 김대중 정부에서는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이 산파역할을 했다. 박 전 장관은 2000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북한의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비공개 특사 회담을 3차례 가졌다.


1차 정상회담의 준비접촉은 우리측 양영식 당시 통일부 차관과 북측 김령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가 이끌었다. 회담 과정에서 남측에서는 박재규 통일부 장관, 임동원 국가정보원장, 황원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활약했다.


북측에선 이번 평창올림픽 기간 방남했던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당시에도 간판 역할을 했다. 1차 회담에서 눈에 띄는 북한 인사로는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이 꼽혔다. 의례적인 측면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에 비해 김용순 위원장은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참여정부 시절 성사된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의 공식·비공식 라인이 총동원됐다. 남측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을 2005년에 대북특사로 파견, 정상회담의 첫 단추를 뀄다.


이후 우리 정부는 2007년 7월 초 북측에 김만복 원장과 김양건 부장간 접촉을 제안했고 북측이 8월 2일 비공개 방북을 요청해 양측 고위급 접촉이 성사됐다.


김 원장 외에 현재 국정원장으로 있는 서훈 당시 국정원 대북담당 3차장이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 서 원장은 2000년 1차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도 박지원 특사와 동행해 대북 접촉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정상회담에서 북측은 1차 회담 당시 회담을 이끌었던 김용순 위원장 대신 김양건 부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권력을 잡으면서 처형된 정성택 당시 수도건설1부부장도 주목을 받았다. 




대북특사의 조건, 정치력·협상력에 '격'까지…누가 적임자?




2018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대화 기조가 이어지고, 북미관계까지 개선의 여지가 포착될 경우,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논의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대북특사 파견 여부가 자연스럽게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북측과 회담의 의제·형식·조건 등 포괄적인 의제를 논하기 위해서다.

대북특사 후보자를 고려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과거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 때(2000년)는 당시 박지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임동원 국정원장이, 노무현 정부 때(2007년)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이 특사로 활동한 결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대통령의 최측근 혹은 정권실세(박지원·정동영), 대북정책 책임자(정동영), 국정원장(임동원·김만복)이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하게 북측에 전달할 수 있고, 어느 수준의 재량권이 있을 정도의 실권자이면서,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인사들이 대북특사로 갔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고려 대상은 사실상 대남특사로 방남을 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다. "국무위원장(김정은)의 특명을 받고 왔다"고 밝힌 김 부부장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이다. 김일성의 직계가족인 이른바 '백두혈통'의 첫 방남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재량권'을 가질 정도의 최측근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대북특사도 정치적 위상에 보다 초점이 맞춰질 여지가 큰 셈이다.

이에 문재인 정부에서 대북특사에 걸맞는 인사로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우선 거론되고 있다. 임 실장은 문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임 실장 본인도 국회의원 시절부터 통일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와 전문성도 나름 갖췄다. 이미 아랍에미리트(UAE) 특사로 파견을 가며 양국 간 이슈를 원만히 해결한 실적도 있다. 다만 보수진영이 임 실장을 꾸준히 '주사파'라고 비판해온 점은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전문성에 무게를 둔다면 서훈 국정원장이 빠질 수 없다. 대북협상에 관한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가 서 원장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박지원 특사를 수행해 북측과 협상을 했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하고 정상선언문 작성 과정에도 관여했다. 이외에도 수차례 북측과 접촉한 경험이 있다. 기밀을 다루는 현역 국정원장 특성상 공식적인 활동 보다는 '수면 아래'에서 활약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한 주무장관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전문성을 갖췄다. 최근 평창동계올림픽의 북한 참가 협상 등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으로 활약했고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을 정도로 경험이 많다. 

정치적 무게감이 떨어지는 면은 단점이 될 수 있다. 참여정부 때 대북특사를 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실세 장관'이었던 것과 차이난다.

'격'을 따졌을 때 이낙연 국무총리가 나서야 한다는 말도 있다. 북한의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김여정 부부장과 함께 방남을 했기 때문이다. 북측의 대남특사에 이은 대북특사를 고려할 때 '격'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 총리가 제격이라는 주장이다. 

정부의 2인자로 지나치게 상징성이 크다는 점, 정치적으로 여권에서 '비주류'에 가까운 인사라는 점 등은 변수다.

한편 정부는 대북특사와 관련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과 향후 진행될 '협상'을 고려했을 때 섣불리 앞서 나가는 것도 이로울 게 없다는 말도 나온다. 북미관계 등 문 대통령이 언급한 '여건'이 갖춰지는 게 우선이라는 기류다. 통일부는 19일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대북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에 대해 "아직 정부의 입장이 정해진 건 없다"고 밝혔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