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남북 분단 73년. 그 기간 동안 남북은 두 차례 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조성 등 결빙과 해빙의 시기를 이어왔다. 정상회담을 비롯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던 남북 간 중요 합의 뒤에는 수많은 회담 일꾼의 노력이 있었다.
남북회담사에서 대북 밀사의 시초로 꼽히는 사람은 박정희 정부 시절 '7·4남북공동성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이 전 부장은 당시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이른바 '이-박 라인'을 형성해 수차례 북한을 드나들었다.
5공화국 정부에선 장세동 안기부장이 허담 북한 노동당 비서와 '장-허 라인'을 구축, 밀사외교를 맡았다. 6공화국에선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대북 밀사역으로 활동했다.
분단 이후 첫 정상간 만남이 성사된 김대중 정부에서는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이 산파역할을 했다. 박 전 장관은 2000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북한의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비공개 특사 회담을 3차례 가졌다.
1차 정상회담의 준비접촉은 우리측 양영식 당시 통일부 차관과 북측 김령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가 이끌었다. 회담 과정에서 남측에서는 박재규 통일부 장관, 임동원 국가정보원장, 황원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활약했다.
북측에선 이번 평창올림픽 기간 방남했던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당시에도 간판 역할을 했다. 1차 회담에서 눈에 띄는 북한 인사로는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이 꼽혔다. 의례적인 측면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에 비해 김용순 위원장은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참여정부 시절 성사된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의 공식·비공식 라인이 총동원됐다. 남측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을 2005년에 대북특사로 파견, 정상회담의 첫 단추를 뀄다.
이후 우리 정부는 2007년 7월 초 북측에 김만복 원장과 김양건 부장간 접촉을 제안했고 북측이 8월 2일 비공개 방북을 요청해 양측 고위급 접촉이 성사됐다.
김 원장 외에 현재 국정원장으로 있는 서훈 당시 국정원 대북담당 3차장이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 서 원장은 2000년 1차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도 박지원 특사와 동행해 대북 접촉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정상회담에서 북측은 1차 회담 당시 회담을 이끌었던 김용순 위원장 대신 김양건 부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권력을 잡으면서 처형된 정성택 당시 수도건설1부부장도 주목을 받았다.
대북특사의 조건, 정치력·협상력에 '격'까지…누가 적임자?
2018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대화 기조가 이어지고, 북미관계까지 개선의 여지가 포착될 경우,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논의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대북특사 파견 여부가 자연스럽게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북측과 회담의 의제·형식·조건 등 포괄적인 의제를 논하기 위해서다.
대북특사 후보자를 고려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과거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 때(2000년)는 당시 박지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임동원 국정원장이, 노무현 정부 때(2007년)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이 특사로 활동한 결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대통령의 최측근 혹은 정권실세(박지원·정동영), 대북정책 책임자(정동영), 국정원장(임동원·김만복)이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하게 북측에 전달할 수 있고, 어느 수준의 재량권이 있을 정도의 실권자이면서,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인사들이 대북특사로 갔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고려 대상은 사실상 대남특사로 방남을 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다. "국무위원장(김정은)의 특명을 받고 왔다"고 밝힌 김 부부장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이다. 김일성의 직계가족인 이른바 '백두혈통'의 첫 방남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재량권'을 가질 정도의 최측근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대북특사도 정치적 위상에 보다 초점이 맞춰질 여지가 큰 셈이다.
이에 문재인 정부에서 대북특사에 걸맞는 인사로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우선 거론되고 있다. 임 실장은 문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임 실장 본인도 국회의원 시절부터 통일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와 전문성도 나름 갖췄다. 이미 아랍에미리트(UAE) 특사로 파견을 가며 양국 간 이슈를 원만히 해결한 실적도 있다. 다만 보수진영이 임 실장을 꾸준히 '주사파'라고 비판해온 점은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전문성에 무게를 둔다면 서훈 국정원장이 빠질 수 없다. 대북협상에 관한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가 서 원장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박지원 특사를 수행해 북측과 협상을 했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하고 정상선언문 작성 과정에도 관여했다. 이외에도 수차례 북측과 접촉한 경험이 있다. 기밀을 다루는 현역 국정원장 특성상 공식적인 활동 보다는 '수면 아래'에서 활약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한 주무장관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전문성을 갖췄다. 최근 평창동계올림픽의 북한 참가 협상 등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으로 활약했고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을 정도로 경험이 많다.
정치적 무게감이 떨어지는 면은 단점이 될 수 있다. 참여정부 때 대북특사를 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실세 장관'이었던 것과 차이난다.
'격'을 따졌을 때 이낙연 국무총리가 나서야 한다는 말도 있다. 북한의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김여정 부부장과 함께 방남을 했기 때문이다. 북측의 대남특사에 이은 대북특사를 고려할 때 '격'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 총리가 제격이라는 주장이다.
정부의 2인자로 지나치게 상징성이 크다는 점, 정치적으로 여권에서 '비주류'에 가까운 인사라는 점 등은 변수다.
한편 정부는 대북특사와 관련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과 향후 진행될 '협상'을 고려했을 때 섣불리 앞서 나가는 것도 이로울 게 없다는 말도 나온다. 북미관계 등 문 대통령이 언급한 '여건'이 갖춰지는 게 우선이라는 기류다. 통일부는 19일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대북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에 대해 "아직 정부의 입장이 정해진 건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