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법률주의와 예산근거입법(상)

[the300][정재룡의 입법이야기]모든 예산에 법적근거 두면 연중심사 효과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 l 2018.03.08 16:07
지난 2월 발표한 여당의 개헌안과 3월 7일 보도된 정부의 개헌안(초안)은 모두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하기로 했다. 예산법률주의는 현재 사업의 명칭과 금액이 열거된 통계표 형식의 예산서를 법률 형식으로 바꾸어 의결함으로써 예산에 법률의 효력을 부여하는 개념이다. 예산서가 법률로 바뀌게 되면 예산 집행에서도 법률 준수 의무가 부여됨에 따라 책임성 확보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예산법률주의가 도입되면 국회 예산심의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사실 예산법률주의 도입 자체만으로는 예산심의에서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예산법률주의의 도입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와 정부형태가 같은 대통령제이면서 예산법률주의를 시행하는 미국의 경우를 보면 의회가 예산을 승인하는 데에는 두 단계의 입법절차가 필요하다. 각 상임위원회에서 기관이나 사업에 세출승인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입법을 먼저 하는데, 이를 수권입법(authorizing legislation)이라고 한다. 그 후 세출위원회에서 그 권한이 부여된 기관이나 사업에 대해 지출규모를 결정하는 입법을 하는데, 미국은 정부에 예산편성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예산편성이라고 볼 수 있고, 그 결과가 세출예산법이다. 

원칙적으로 수권법은 자금이 사용되는 목적 및 방법을 규정하고, 세출예산법은 지출될 자금의 크기를 규정하지만, 이와 같은 관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미국 의회 내의 이 두 가지의 입법과정에서 상당한 갈등이 존재한다. 수권법에서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 대부분의 세출예산법에서 자금의 집행방법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19세기 미국 의회에서 전개되었던 논쟁을 살펴보면 예산과정에서 수권과 예산편성을 분리시킨 이유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실체입법을 둘러싼 갈등이 연방기관에 대한 자금의 흐름을 저해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심의 중인 기관에 대한 자금 제공이 긴급하다는 이유로 의회가 집행방법 등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산편성과는 별도로 수권의 단계를 설정하여 예산편성에 앞서서 미리 시간을 두고 집행방법 등을 심도 있게 심사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도 개헌으로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하게 되면 미국처럼 두 단계의 입법절차가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에는 우리도 정부의 예산편성 및 국회의 예산심의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각 예산에 대한 법적 근거를 확인하고 있지만 그것이 원칙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 원칙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를 예산근거입법이라고 부른다.

국회는 종래 예산안이 제출된 이후에야 예산안을 심사할 수 있었으나, 예산법률주의의 도입에 따라 국회가 모든 예산에 법적 근거를 두도록 하면 국회는 정부의 예산법률안이 제출되기 이전에 각 개별 법률의 입법과정에서 예산 근거 규정에 대한 심사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연중 내내 예산을 심사하는 효과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예산에 대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심사가 가능하게 된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이 확립되면 국회는 개별 법률에 예산의 목적과 용도, 내용, 제약, 권한과 책임, 연도별 한도액, 집행방법 등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충실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정부는 이를 준수하여 예산을 집행하게 될 것이므로 예산집행에서 국회의 의사가 보다 존중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국회는 필요한 경우 기관별·사업별로 탄력적인 예산집행을 허용할 수도 있다.

예산근거입법 과정에서 중요한 사항은 기관이나 사업이 예산을 지출할 수 있는 회계연도와 예산한도액을 규정할지 여부라고 하겠다. 회계연도와 예산한도액을 전혀 명시하지 않고 단지 그 조항의 집행에 필요한 자금이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규정만을 두거나, 회계연도와 예산한도액 중 하나만을 규정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양자 모두를 규정하여 그 범위 내에서만 자금이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국회가 개별 법률에 특정 사업의 예산한도액을 설정한 예로는 2005년 3월 제정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51조를 들 수 있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이 정부의 예산안 편성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산근거입법 원칙이 정부의 예산안 편성권에는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할 때 예산근거법의 연도별 한도액을 초과하거나, 이보다 적은 금액을 계상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계상하지 않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정부가 아예 법률의 근거가 없는 예산의 편성도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이 확립되면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예산을 편성하게 될 것이므로 예산근거입법 원칙의 예산안 편성권에 대한 영향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안 편성권은 정보의 우위, 능률성 등을 고려하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감안해서 국회로부터 위임된 것일 뿐 재정민주주의라는 이념에 입각해 볼 때 국회의 관여가 전혀 용인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헌법 제54조는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한 때에는 정부는 국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될 때까지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할 수 있는 경비로서 ‘법률상 지출의무의 이행’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회가 법으로 지출의무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외부기고/칼럼]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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