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법률주의와 예산근거입법(하)

[the300][정재룡의 입법이야기]투명하고 합리적 예산편성 기대하려면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 l 2018.03.15 11:00
[상편에서 이어집니다]…예산근거입법 원칙이 확립되는 경우 상임위원회와 예결위원회 간에 예산심의의 중복성 및 비효율성 문제를 개선할 수 있게 된다. 상임위원회는 종래처럼 예산법률안을 심의할 필요가 없고 연중 예산근거입법을 통해서 개별 예산을 심의하게 되고 예산법률안은 예결위원회에서만 심의하게 된다. 

법률에 예산의 근거를 규정하는 입법조치는 상임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예결위원회는 예산심의에서 법률의 근거가 없는 경우에는 그 예산을 삭제하게 되고, 개별 사업에 연도별 한도액이 설정된 경우에는 그 한도액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세출의결할 수 있다. 이로써 상임위원회와 예결위원회 사이에 예산권한이 적절하게 배분되고, 모든 의원들에게 예산권한이 제공되는 체계가 구축되어 예결위원 선임을 둘러싼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

또한, 정부가 5개년의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수립하여 국회에 제출하는 것에 상응하여 국회도 예산의 거시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방향설정을 위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안으로서 예결위원회에서 예산결의안을 채택하여 각 상임위원회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예결위원회에서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참조하여 재정규모, 분야별 재원배분계획 및 투자방향 등을 예산결의안으로 제시하면 상임위원회는 이에 부합하도록 예산근거법을 개정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예결위원회는 예산결의안에 조정지침(reconciliation instruction)을 포함하여 여기에 예산근거법의 개정이 필요한 위원회, 개정규모, 개정시한 등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상임위원회는 연중 계속해서 예산근거법을 처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앞서 언급한 분야별 재원배분계획과 투자방향에 부합할 때야만 실효성이 있게 된다. 여기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상임위원회가 처리하는 법률의 추계비용 누계점검(scorekeeping)이다. 상임위원회는 매년 예산결의안 의결 이전이라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의해서 제시되는 분야별 재원배분계획 및 투자방향을 참조하여 각 법률의 추계비용의 누계가 적정한 수준을 초과하지 않도록 입법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이 연착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회법이나 국회규칙으로 이를 명문화하고 국회 내에서 상임위원회와 예결위원회 간에 이를 준수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양 주체 간에 예산권한을 둘러싼 갈등과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는 바, 막상 시행과정상 예산근거법과 세출예산법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특정 예산이 의결되었으나 예산근거법이 전혀 없는 경우, 예산근거법이 있기는 하지만 규정된 회계연도가 이미 경과하였거나 예산한도액을 초과하여 의결된 경우 등을 예상할 수 있다. 양 법률 사이에 불일치가 초래된 경우에는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세출예산법의 효력을 인정하게 되고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입법조치가 필요하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은 예산안 편성․심사 및 집행의 합리화를 도모할 수 있다. 개별 법률의 추계비용이 누계되고 이것이 예산으로 의결되는 체제이므로 예산이 깊이 있는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계상될 수 없고, 장기적인 계획과 심사를 거쳐 예산안이 편성될 것이다. 국회는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참조하여 예산결의안을 작성하면서 국가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재정운용방향과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이는 거꾸로 정부가 예산편성과정에서 반영할 수 있는 재정정책의 지침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예산안이 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편성되는 효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 예산심의과정에서도 미리 예산근거법이 제정되지 않고는 개별 사업의 예산을 반영할 수 없으므로 막바지에 불합리한 예산을 끼워넣는 관행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또한 예산집행에 있어서 예산근거법의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므로 예산집행의 투명성 책임성 및 효율성이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국회예산정책처가 담당하고 있는 법안비용추계제도는 법안의 시행 전에 미리 시행에 소요될 비용을 분석해 봄으로써 거시적으로는 국가 재정적자를 통제하고 재정운용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며, 미시적으로는 개별 법안의 효율성을 따져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법률의 근거가 없는 예산지출이 허용되고 있는 관계로 비용추계제도가 그 취지만큼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최근 의원입법이 활성화되면서 재정소요법률이 증가하고 있는바, 재원의 한계로 인해 법률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집행되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이 확립되면 법안심사에서 비용추계서는 핵심적 자료가 되고, 각 상임위원회는 각 법률의 추계비용의 누계가 예산결의안이 제시하는 재원한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입법과정에서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원한도를 초과하여 예산지출이 불가능한 실효성 없는 법률이 제정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당의 개헌안과 정부의 개헌안(초안) 모두 국회가 예산안의 총액 범위에서 사업별 증액 조정이나 비목 신설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국회의 예산심의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예산근거입법 원칙은 그러한 측면에서 하나의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사실 예산근거입법 원칙은 개헌 이전에라도 국회 단독의 결정으로 채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국회는 예산심의에서 감액 이외에 예산 증액 조정 등에 관한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채택하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번에 개헌을 하면 반드시 국회에 예산 증액 조정권이 주어져야 한다. 만약 개헌이 안 된다면 헌법 제57조의 재해석을 통해서 가능한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국회가 예산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산법률주의 도입의 의의를 살리는 길이고, 국회가 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예산심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길이다. [외부기고/칼럼]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교육문화체육관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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