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법률안 제출권, 폐지되어야 하나

[the300][정재룡의 입법이야기]유지 필요…'10명 동의' 文개헌안 바람직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 l 2018.04.10 12:30
지난 3월 7일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개헌안(초안)에서 대통령 권한의 분산 차원에서 정부의 예산증액동의권과 법률안 제출권을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 3월 22일 발표한 대통령 개헌안에서 이들 권한은 모두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청와대에서 그 짧은 기간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필자는 이 두 권한이 되살아난 것은 모두 관련 정부 부처가 강하게 개입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부의 예산증액동의권은 예산편성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정부의 예산증액동의권 때문에 예산편성과정뿐 아니라 국회의 예산심의과정마저 주도하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쉽게 그 기득권을 내려놓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의 경우는 법제처의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법률안 제출권이 폐지되면 법제처도 폐지되는 운명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법제처는 어떻게든 법률안 제출권의 폐지를 막아야 했을 것이다.

정부의 두 권한 중 예산증액동의권은 대통령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하루속히 폐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법률안 제출권도 같이 폐지되어야 하는 것인가? 현재 국회의원과 학계, 시민단체 등 거의 대부분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일까?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예산안 편성권과 달리 법률안 제출권은 정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국회의원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볼 때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이 정부에 어떤 유리한 지위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과거와 달리 최근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정부 제출 법률안은 의원 발의 법률안보다 오히려 경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정부가 입안한 내용을 직접 정부 법률안으로 제출하기보다는 소위 우회입법으로 추진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도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을 폐지하는 것이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혹자는 미국식 대통령제에 따르면 입법권은 국회에 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다른데 그걸 고려하지 않고 외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현재 정부가 예산안 편성(제출)권을 갖고 있는데, 설령 국회가 자율적인 예산심의권을 갖는다 하더라도 누구도 미국처럼 우리도 국회가 예산안 편성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현실이 미국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개헌이 되더라도 계속 예산(법률)안을 편성(제출)하게 될 것인데 이와 달리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만 폐지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우리의 경우 미국과 달리 정부가 국가 운영을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정부에 법률안 제출권을 아예 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맞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정부가 입안한 정책 가운데 뜨거운 감자여서 발의할 의원을 구할 수 없어서 우회입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정부가 제출하여 입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는데,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이 폐지되면 그런 경우 입법 추진의 기회가 봉쇄될 수도 있다.

일례로 교문위원회는 2015년 말 강사법의 시행을 3차 유예하면서 교육부에 1년 안에 보완입법안을 마련하여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는데, 교육부는 2016년 9월에 보완입법안을 마련하였지만 그것을 발의할 의원을 구하지 못해 결국 5개월여의 정부 내 절차를 거쳐 2017년 1월에 개정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정부에 법률안 제출권이 없다면 이런 법률안은 국회에서 심의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더욱이 대통령 개헌안에는 국민발안권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에게도 법률안을 제출할 기회는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의원은 법률안을 입안하면 아무런 절차 없이 바로 발의할 수 있는 반면, 정부는 입안 이후 관계부처협의, 입법예고, 규제심사, 법제처심사 등 여러 절차를 거쳐 제출하기 때문에 정부 제출 법률안은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높다. 최근 정부가 우회입법을 많이 활용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입법의 경우에는 정부가 우회입법이 아니라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책임있게 정부 명의로 제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정부가 국정에 대한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은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정부 제출 법률안의 실태를 살펴보면 중요한 사항들은 거의 대부분 우회입법으로 추진하고 지엽적인 것 위주로 직접 정부 명의로 제출하고 있다. 대기환경보전법의 경우 2016년 12월 말부터 1년여 사이에 신고에 대한 수리 간주 규정 등 지엽적인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을 무려 5건이나 제출한 사례에서 보듯이 최근 정부가 법률 개정안을 너무 빈번하게 제출하여 행정력을 낭비하고 국회의 입법심의에 지장을 주고 있다. 

대통령 개헌안은 정부가 법률안을 제출할 때 의원 1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제출할 수 있도록 제한을 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제한은 현재 정부의 무질서한 법률안 제출 행태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본다.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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