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목소리 키우고 떠났다…'진보정당 선구자' 노회찬(종합)

[the300] '삼성X파일' 폭로로 스타덤…비례대표제 주장으로 국회 문턱 낮추기도

이재원 기자 l 2018.07.23 15:36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사망으로 정치계가 충격에 빠졌다. 한국 노동·진보정치계의 선구자로 불리는 노 원내대표다. 국회 안팎에서 촌철살인의 논평과 SNS 등으로 강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민주평화당과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에 성공, 정의당의 목소리를 찾아온 것도 그다. 그의 죽음으로 지방선거 이후 지지율이 상승하며 승승장구하던 정의당의 행보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학생민주화운동으로 시작한 노 원내대표는 노동운동, 진보정당 육성이라는 진보 정치인의 길을 고집했다. 17대 국회에 처음 입성한 뒤 19대, 20대 의원직을 거치는 동안에도 진보정당인으로만 살았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의 창당이 그의 작품이다.

노 원내대표는 학생운동으로 그의 정치인생의 길을 열었다. 1956년 경남 부산 출생인 노 의원은 경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3년 당시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유인물 제작활동 등으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황교안 전 국무총리 등이 그의 동기다.

1979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뒤엔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전기용접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위장취업을 하는 등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엔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만난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을 출범했다. 중앙위원을 맡아 활동을 주도한 노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989년 체포, 1992년까지 복역했다.

출소 직후엔 본격적인 진보정당 설립 추진에 나선다. 1992년 4월 결성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가 그것이다. 당시 진보 후보였던 백기완 후보의 대선 참패로 많은 이들이 진보 세력의 독자 정치세력화에 회의를 가졌지만, 노 원내대표는 2~4기 대표를 역임하며 진정추 활동에 매진했다.

1997년에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운 대통령 선거 대비 조직 '국민승리21'의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 대선엔 패배했지만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연결됐다. 노 원내대표는 초대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맡았다. 2000년 16대 총선, 2002년 지방선거 등을 총괄했다.

이 기간 노 원내대표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오늘날 진보 정치인들이 국회로 진입할 수 있는 유력한 통로 중 하나다. 노 원내대표 역시 비례대표제의 제도화 덕에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원내에 진입했다.

국회에 입성한 그는 삼성그룹으로부터 이른바 '떡값'을 받아온 검사 7인의 명단을 공개했다. '삼성 X파일' 폭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노 원내대표는 대중적 인지도는 물론, 인기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노 의원은 1심에서 징역 6개월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노 원내대표는 "사필귀정"이라는 소감을 내놔 화제가 됐다.

2007년 대선에선 민노당 후보 출마를 결정하고, 경선에 도전했지만 권영길 후보에 패배했다. 권 후보가 직전 대선보다 더 낮은 지지율로 패배하자 노 원내대표는 이듬해 심상정 의원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창당 직후 노원 병 지역구로 18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홍정욱 후보에 패배했다. 19대 총선에서 다시 같은 지역구에 도전, 57%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 9개월 만에 의원직을 내려놨다. '삼성X파일'이 발목을 잡았다. 2013년 2월 대법원이 2심 판결을 뒤엎고 징역 4월(집행유예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형을 재차 확정하면서다. 판결에 대해 "해괴망칙한 판단"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국회를 떠난 노 원내대표는 이후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촌철살인의 언행으로 눈길을 끌었다. 위트넘치는 SNS 게시물로 젊은 유권자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결국 노 원내대표는 20대 총선에서는 지역구를 경남 창원 성산으로 바꿔 출마, 당선됐다. 심상정 의원과 함께 진보정당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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