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 대화 47년, 4대 합의 진작 이행했다면…

[the300][남북이 연결된다]<3>연결의 역사-①1972~2007년 남북합의들

권다희 기자, 백지수 기자 l 2018.09.12 04:01


2007년 남북정상의 10·4 선언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이용해 참가하자고 합의했다. 이산가족의 상시 상봉·영상편지 교환 사업도 계획했다. 지금 봐도 파격적인 합의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내 착공을 거듭 강조하는 남북 철도연결은 1992년 합의됐다.

이 모든 약속이 그때 이행됐다면. 올해 평창동계올림픽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뉴스도 안되는 '일상'이었을지 모른다. 이산가족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만났다면 애끓는 눈물도 크게 줄었을 거란 지적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남북 대화와 교류가 조명받고 있지만 47년째 대화를 해 온 점은 잊혀졌다. 1971년 이산가족 대화를 위한 적십자회담 파견원 접촉부터다. 정부집계 회담 횟수만 660회, 남북정상 또는 국무총리급으로 이정표를 세운 합의만 네 차례다.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하고도 남북은 공존과 연결, 평화번영까지 나가지 못했다.

◇긴장완화·인도적 교류부터= 한국전쟁의 기억이 생생하던 시절 최우선 과제는 군사적 긴장완화였다.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군사 다음은 인도주의적 교류였다. 이산가족 상봉이다. 경제는 후순위였다. 

한국전쟁 후 남북이 처음으로 ‘통일 원칙’에 합의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그랬다. 4대 합의 중 첫째인 성명은 군사적으로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 "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위한 서울·평양 간 상설 직통전화 설치"에 합의했다. 또 이산가족상봉을 위해 "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한다"고도 합의했다. 남북 간 협의기구인 남북조절위원회 구성도 약속했다.

세계적 탈냉전 분위기가 무르익은 1991년 남북은 한 발 더 나갔다. 노태우 정부 시절 맺은 '남북기본합의서'는 4장 25개조로 △남북화해 △남북 불가침 △교류·협력 등 전 분야를 망라한다. 특히 군사적으로 “불가침 이행·보장을 위해 남북 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고 명시했다. 군사공동위는 대규모 부대 이동, 군사연습 통보,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 등을 협의하기로 했다. 

경제협력은 1990년대에야 수면위로 올랐다. 1992년 9월 17일 발효된 ‘남북 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는 남북 경제협력을 구체화했고, 철도·도로 연결, 항로 개설 등을 약속했다.

◇빛 못 본 합의, 왜?= 7·4 공동성명은 획기적이긴 했지만 생명이 짧았다. 같은 해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국내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자 성명은 사실상 폐기됐다는 평가다. ‘통일을 위해 국내 체제 정비가 필요하다’는 박정희 정부의 '체제유지' 논리에 남북관계 합의가 동원된 것이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떠밀린 측면도 있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데탕트 즉 냉전 해빙 기류가 무르익었다. 미 정부는 박정희 정부에 북과의 대화를 촉구했다. 휴전협정 체결 20년이 채 안 됐을 때다.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체제경쟁에서 북한에 압승을 거둔 시기도 아니다. 북한은 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1990년대 북한의 변화, 미국의 대응은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북한은 탈냉전 후 안보 불안, 경제정책 실패에 따른 민생고가 겹쳤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다. 핵개발을 본격화했다. 미국 등 국제사회는 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제네바 합의 등 일부 진전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핵개발을 체제보장의 지렛대로 쓰려는 북한과, 핵을 포기한 뒤에야 북이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미국 사이 계산법이 너무 달랐다. 미국의 강경론이 커질수록 북한의 핵개발 집착은 강해졌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밟기까지 남북대화는 헛돌았다.

◇경제 대화 2000년대부터= 2000년대 들어 연결의 문이 다시 열렸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 대북 포용정책, 미국 정부의 호응이 겹쳤다. 특히 경제와 사회·문화적 교류로 연결의 범위를 넓혔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경제협력'이 본격 등장했다. 경제협력 논의는 10·4 선언 때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0·4 선언은 “투자를 장려하고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한다"며 경협 활성화를 내세웠다. "민족내부협력사업의 특수성에 맞게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했다"고도 했다.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 건설 1·2단계 계획 이행, 해주를 중심으로 해주항과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염두에 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를 합의했다.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설치에 합의했고,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해 남북공동어로수역 지정 등에도 뜻을 모았다. 철도와 통신 연결 사업도 구체화했다. 인적교류도 가속됐다. 6·15 선언이 있던 해 제1차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고 2018년 21차까지 이어졌다.

2018년 판문점선언은 2007년 10·4선언에, 10·4선언은 2000년 6·15선언에 뿌리를 둔다. 남북을 연결하려는 노력은 대외 환경과 남·북 대내 여건이 맞물리며 가속과 감속, 후퇴도 겪었다. 전향적인 합의들을 진작 이행했어야 한다는 아쉬움도 크다. 여권에선 "한 해 세 차례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가 급진전하는 올해, 과거 실패사례를 거울 삼아 확실한 진전을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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