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시(野視視)]삭발의 추억

[the300]한국당, '투쟁의 삭발' 그 이상이 필요하다

박종진 기자 l 2019.05.03 05:05

편집자주 야(野)의 시각에서 봅니다. 생산적인 비판,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고민하면서 정치권 안팎의 소식을 담겠습니다. 가능한 재미있게 좀더 의미있게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자유한국당 이창수 충남 도당위원장(왼쪽부터), 성일종, 김태흠, 이장우, 윤영석 의원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진행된 '문재인 좌파독재정부의 의회민주주의 파괴 규탄 삭발식'에서 삭발을 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기자


# 1961년 경북 영주의 한 어머니는 평생 길러온 머리카락을 잘랐다. 군대 휴가 나온 아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기 위해서다. 날품팔이로 힘겨운 생활에 내다 팔 거라곤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 가슴 먹먹한 이 사연은 많은 이들을 울렸다. 신문에 소개됐고 1965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당대의 거장 강대진 감독이 연출한 '삭발의 모정'이다.

2일 발달장애인 학부모 등이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했다. 발달장애인의 낮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라는 주장이다. 국가가 책임져주지 않으면 자식과 한날 한시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부모들의 절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지난해 4월 209명이 삭발해 머리카락을 청와대 앞에 쌓아놓기도 했다.

삭발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희생과 헌신의 극단적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삭발은 단절이다. 가장 소중한 것조차 내어 던지는 절연이다. 종교적 의미를 담은 삭발이 그렇다. 불교에서 출가할 때 머리를 깎는 일은 세속의 번뇌를 끊어낸다는 뜻이 담겼다.

과거와 결별은 새로운 탄생, 출발이다. 마음가짐부터 다잡는다. 도전과 결의를 다지는 의미다. 평범한 이들도 살면서 한번쯤 경험하기도 한다. 수험생들의 삭발이 대표적이다.

효과도 거둔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운명의 여인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는 배역에 집중하기 위해 삭발했다. 그녀의 연기투혼은 두고두고 호평을 받는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국민적 희망을 줬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9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지자 1999년 8월 삭발했다. 거짓말처럼 다음 경기부터 거침없는 7연승을 거뒀다.

# 삭발은 투쟁이다. 저항의 상징이다. 자신을 던져 온몸으로 싸우겠다는 표현이다.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에서 수많은 삭발이 있었다. 한때 학기 초만 되면 등록금 투쟁 등을 벌이며 학생회장단이 삭발하는 건 단골 메뉴였다.

최근 정치권에서 삭발은 여야 간 극한 대립 상황에서 나왔다. 2007년 한나라당의 사학법 재개정 요구 삭발, 2010년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계획 수정에 충청권 의원들의 삭발, 2013년 정당해산 심판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집단 삭발 등.

그리고 2일 자유한국당 의원 4명이 국회에서 삭발식을 열었다.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강행에 따른 반발이다. 당 공식행사는 아니었지만 전날까지 10명이었던 삭발 예정 의원이 당일 아침 4명으로 줄어드는 등 다소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비장하고 절박하지만 치밀한 전략에서는 아쉬움이 적잖은 한국당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국당을 둘러싼 환경은 만만치 않다. 국회에선 여야 4당에 포위됐다. 민심은 아직 한국당에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총선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한국당에는 '투쟁의 삭발' 그 이상이 필요하다. 희생과 헌신, 도전과 성찰, 단절과 결의의 삭발이 절실하다. 그동안의 싸움에서 놓친 것, 읍참마속의 심경으로 끊어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를 위해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 할 지 등이다.

정권에 실망한 민심을 제대로 담기 위한 한국당의 그릇부터 돌아보는 일이다.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 진짜 투쟁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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