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단추 대신 눌러 쓴 친서…'전쟁'도 막았다

[the300][런치리포트-친서외교]①정상간 서신 '소통' 마중물...쿠바 미사일위기도 '친서'로 돌파구

권다희 기자, 오상헌 기자 l 2019.06.24 17:30
【워싱턴=AP/뉴시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재생에너지 관련 연설을 위해 아이오와주로 떠나기 전 기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친서를 받았다고 밝히며 “이번 친서로 뭔가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9.06.12.


꽉 막힌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 '친서(親書·autograph letter)'가 불쏘시개로 재등장했다. '하노이 노딜' 후 4개월째 교착 상태인 북미 협상이 '친서외교'를 계기로 재개될 조짐이다. 

'친서'는 주권국가의 정상(수반)들이 주고받는 서한(편지)이다. 통상 상대를 추어올리는 외교적 수사(레토릭)와 신뢰와 진정성을 알리려는 메시지를 담는다. 현안이나 협상 관련 '디테일'을 넣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친서에는 정상들이 '정치적 결단'을 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용이 담긴다"며 "친서에 결정적 내용을 담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친서는 때로 정상간 직접 만남(정상회담)에 준하는 정치·외교적 효과를 낳는다. 정상 간 '신뢰'를 토대로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동맹국 정상의 친서 교환보단 적대국 수반의 서신 주고받기가 더 극적인 효과를 낳는 사례가 많다. 고비마다 친서가 등장하는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도 마찬가지다. 
  
친서의 드라마틱한 외교적 성과를 보여주는 실례는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다. 1962년 10월 소련이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미소 핵전쟁 위기가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핵·원자폭탄의 위력을 이미 경험한 인류는 핵공포에 휩싸였다. 존 F. 케네디 당시 미 대통령은 소련 함대가 오가는 쿠바 해상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고강도 압박조치에 소련이 반발하면서 상황은 일촉즉발로 흘러갔다. 

파국을 막은 단초는 미소 정상이 은밀히 주고받은 '친서'였다.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최소 두 차례 친서를 보냈다. 1차 편지에는 "(미소 모두) 전쟁의 매듭을 묶은 로프의 끝자락을 잡아당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둘 다 더 잡아당길 경우 매듭이 더 조여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세부적인 협상 내용과 요구 조건 등은 담지 않았으나 "전쟁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달한 것이다. 미소는 군사적 행동 대신 밀사(특사)를 통한 물밑접촉을 이어갔다. 결국 △미국의 쿠바 불가침 보장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 △미국의 터키 미사일 철수 등에 합의하고 극적으로 핵 전쟁을 막았다. 친서에 획기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적절한 '상황 관리'로 전쟁을 막은 사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당시 국제무대에서 '친서외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정상으로 꼽힌다. 2009년 취임 이후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에게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한 내용을 담은 친서를 최소 4차례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취임 초 '저자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2015년 이란 핵협상 타결을 결국 이끌어 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4년 1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미중 온실가스 감축 합의 도출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친서'였다. 
【서울=뉴시스】 북한 노동신문이 2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친서를 보내왔다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친서를 읽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날 김 위원장은 친서 받고, "훌륭한 내용이 담겨있다"며 만족을 표시하며, "트럼프대통령의 정치적판단능력과 남다른 용기에 사의를 표한다고 하시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심중히 생각해볼것" 이고 밝혔다. 2019.06.23. (출처=노동신문) photo@newsis.com


70년 적대관계인 북미 사이에도 유독 친서가 많이 오갔다.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은 김정은 당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2명의 석방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북한은 친서를 받은 후 이들을 전격 석방했다. 

이보다 앞선 2000년 10월10일 한국전쟁 후 방미한 북한 최고위급 인사였던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의 손에도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친서가 들려 있었다. 조 부위원장은 백악관에서 만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적대관계 종식,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등을 담은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친서외교는 같은 달 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의 방북과 김정일 위원장 접견 등으로 이어졌다. 북한 정상의 편지 외교가 북미간 오랜 적대관계를 풀어내는 실마리를 제공했던 셈이다. 클린턴 대통령도 재임 기간 김정일 위원장에게 세 차례나 친서를 보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때도 친서가 오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효과를 보진 못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2년 11월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이 대담한 조치를 취하면 우리도 이에 상응하겠다"는 친서를 보냈다. 대북 강경파가 득세했던 부시 행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실은 후일에야 알려졌다. 

반대로 2007년엔 실무진이 주도한 6자회담의 한계를 느낀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핵신고와 핵폐기를 촉구하는 친서를 보냈다. 2001년 부시 대통령 집권 후 처음으로 보낸 친서다. 그러나 북한이 핵신고를 거부하면서 기대했던 외교적 효과를 달성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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