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km를 달리는 사람들, 배지를 꿈꾸는 관료

[the300]

정현수 기자, 김예나 인턴기자 l 2020.01.23 05:43

정부세종청사에서 서울 여의도 국회까지의 거리는 144.6km. 이 거리를 시속 144km의 마음으로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문의 영광이었던 '고시' 타이틀을 뒤로 하고, 국회의원 뱃지를 노리는 사람들.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꾀하는 정통관료들이다.

관료 영입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은 몇 차례에 걸쳐 관료 출신들의 입당식을 열었다. 가장 먼저 얼굴을 알린 관료는 김용진 전 기획재정부 2차관이다. 김 전 차관은 지난해 11월 민주당에 입당했고, 경기 이천 지역구 후보로 예비등록했다.




①'예산통' '정책통' 관료들이 몰린다


김 전 차관은 이번 정부에서 두드러진 행보를 보였다. 행정고시 30회로 공직에 입문한 김 전 차관은 기재부 공공혁신기획관과 사회예산심의관을 거쳐 2016년 한국동서발전 사장으로 갔다. 공직에서 물러났던 김 차관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17년 6월 기재부 2차관으로 복귀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인사였다. 예산과 공공기관 등을 담당하는 기재부 2차관은 기재부 예산총괄심의관, 예산실장 등을 거쳐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자리로 통했다. 하지만 김 전 차관은 이런 관례를 깨고 공공기관 사장에서 2차관으로 발탁됐다. 전문성을 인정 받은 결과다.

김 전 차관이 도전하는 경기 이천 지역구의 현직은 송석준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송 의원 역시 행정고시 34회로 국토교통부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관료 출신이다. 김 전 차관과 송 의원은 2013년 4월 며칠 차이로 나란히 기재부와 국토부의 대변인에 임명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 전 차관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민주당의 '예산통' 라인에 힘을 실어줄 전망이다. 자유한국당에는 김 전 차관 직전 기재부 2차관을 했던 송언석 의원이 자리잡고 있다. 김 전 차관은 "30년 이상 경제·재정정책을 해오면서 잔뼈가 굵다"며 "여의도 정치현장에서 협상하면서 부대끼겠다"고 말했다.

 김용진 전 기획재정부 제2차관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홍봉진 기자 honggga@

한명진 전 방위사업청 차장(행시 31회) 역시 예산과 세제분야 전문가다. 한 전 차장은 민주당 소속으로 전남 고흥·보성·장흥·강진 출마를 공식화했다. 한 전 차장은 기재부 예산실과 세제실 과장을 두루 거쳤다. 세제실에선 선임 국장인 조세총괄정책관을 지냈다. 한 전 차장은 "경제와 예산 분야의 전문성을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기재부 1차관 라인으로는 육동한 전 국무조정실 국무차장(행시 24회)이 민주당 소속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기재부 1차관은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한다. 과거 모피아(재무부+마피아)로 불리던 인맥들이 주로 기재부 1차관 라인이다.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기재부 1차관 출신이다.

강원연구원장을 지낸 육 전 원장는 기재부에서 정책조정국장과 경제정책국장을 지냈다. 경제정책국장은 기재부 1차관 라인의 핵심 보직이다. 엘리트 코스 중의 엘리트 코스로 꼽을 수 있다. 육 전 원장은 강원 춘천에 출마할 예정이다. 춘천은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차출설이 나오기도 했던 지역구다.

②민주당을 선택한 관료, 한국당을 선택한 관료


최근까지 차관을 지낸 이들도 민주당 입당과 동시에 총선 모드로 들어갔다. 행정고시 33회로 지난해 12월까지 국토교통부 2차관을 지낸 김경욱 전 차관은 충북 충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국토부 2차관은 철도와 도로, 항공 등 교통인프라를 총괄한다. 김 전 차관은 철도국장과 교통물류실장 등을 거쳐 2차관까지 올랐다. 국회로 민원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교통인프라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영입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관세청장에 임명된 김영문 전 청장(사시 34회)과 강준석 전 해양수산부 차관(기시 22회)도 지난해 12월 나란히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들은 각각 울산 울주와 부산 남구갑에서 국회의원을 꿈꾸고 있다.

정치권에 도전장을 내민 관료들의 면면을 보면 아무래도 민주당 소속이 많다. 과거에도 관료들의 정치권 진출은 집권여당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4년 전 총선에서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에 관료 출신들이 주로 포진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서울=뉴스1) 임세영 기자 = 육동한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가운데)과 한명진 전 방위사업청 차장(사진 오른쪽)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입당식에서 입당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20.1.15/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민주당 입장에선 20대 국회에서 관료 출신의 전문성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기재부 출신의 김정우 민주당 의원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까지 맡으며 고군분투했지만, 숫적 열세는 분명했다. 올해 예산을 심의했던 지난해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송언석 의원이 활약했던 것과, 지속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공격한 추경호 의원의 활약이 두드러져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정치 신인을 꿈꾸는 관료가 없는 건 아니다. 박근혜 정부 마지막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었던 김재수 전 장관은 대구 동구을에 출사표를 던졌다. 대구 동구을은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의원이 내리 4선을 한 지역구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대구 동구을 출마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격전지가 될 전망이다.

이 밖에 김승수 전 자치분권위원회 기획단장(대구 북구을), 김현기 행정안전부 전 지방자치분권실장(경북 성주·고령·칠곡), 하영제 전 농림수산식품부 2차관(경남 사천·남해·하동)도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 보수 세력이 강한 영남 지역이다.

정치권이 관료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는 '정무적인 감각을 지닌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국회 업무가 많은 고위직 관료들은 자연스럽게 정무적 감각이 늘어난다. 동급생 중 가장 뛰어나 고시까지 통과한 이력 역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출마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공직 사퇴시한인 지난 16일까지 끊임없이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은 관료가 적지 않다. 해당 관료는 "1월 16일이 끝나고 나니 이제야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③정무직으로 범위를 넓히면?


정통관료를 제외하고 정무직 공무원까지 범위를 넓히면 올해 총선에 나서는 공무원 출신들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당장 무게감이 달라진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대표적이다. 이 전 총리는 이번 총선의 민주당 간판이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이 전 총리에게 서울 종로 출마를 제안했다. 이 전 총리는 즉답을 피했다고 한다.


(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4·15총선 출마를 위한 공직자 사퇴시한(16일)을 하루 앞둔 15일 오후 서울 청와대 춘추관에서 마지막 인사 후 생각에 잠겨 있다. 2020.1.15/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출신인 윤영찬 전 국민소통수석, 이용선 전 시민사회수석, 정태호 전 일자리수석, 주형철 전 경제보좌관, 하승창 전 사회혁신수석, 한병도 전 정무수석도 총선을 준비 중이다. 고민정 전 대변인, 권혁기 전 춘추관장, 김영배 전 민정비서관, 김의겸 전 대변인,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 등의 이름 역시 총선 출마자 명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장관을 지낸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개호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진선미 전 여성가족부 장관 등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문재인 정부의 장관을 지낸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개호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진선미 전 여성가족부 장관 등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출마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재부 출신으로 아주대 총장을 하다가 부총리가 된 김 전 부총리는 대외적으로 총선 출마를 거론한 적이 없다. 하지만 꾸준히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관료 출신은 아니지만 '신의 직장'이라고 꼽히는 공공기관의 수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들도 있다. 김성주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이달 초 중도 퇴임했다. 700조원의 국민연금기금 운용의 총책임자인 국민연금 이사장은 선출 과정이 초미의 관심사일 정도로 요직이다. 정치인 출신인 김 전 이사장은 국회 복귀를 위해 이 자리를 스스로 떠났다.


이 밖에 김병원 전 농협중앙회 회장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농민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농협중앙회장 자리지만, 김 전 회장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전남 나주·화순 지역구에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이강래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김형근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도 총선에 나선다. 이를 두고 "그 어떤 자리보다 국회의원 자리가 높은 자리라는 게 다시 한번 확인됐다"는 말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