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聯 '정책 정당' 시동, 선두에 선 민병두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새정치연합 민병두, 언론 출신 아이디어맨

김성휘 기자 l 2015.01.27 08:33
민병두 새정치연합 의원의 머릿속/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해외직구가 아니라 해외직판이다."(2015년 1월 4일) 

2015년 1월, 야당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이 중소기업의 전자상거래를 통한 해외직접판매(해외직판) 확대를 제안했다. 야당의 새해 첫 정책제안이 개헌도, 정당개혁도 아닌 '중소기업 경제'라는 게 포인트. 

해외 직구(직접구매)가 급증, 국내 유통가가 생존을 고민하는 데다 소비자피해도 늘어난 것에 착안했다. 거꾸로 우리 중소기업이 온라인으로 해외에 상품을 파는 '직판'은 왜 못할까 하는 것이다. 

43만곳이 넘는 중소기업 중 20%인 8만여곳이 수출기업이지만 인터넷을 통한 수출은 2013년 기준 총 수출액의 0.004%에 불과하다. 이에 중기가 해외 각국에 온라인쇼핑몰을 개설해 해외직판에 나설 수 있도록 정책기관을 설립하고 금융지원도 받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정책연구원의 약진은 지난해 말부터다.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고 '100세시대위원회'를 꾸려 선제적인 고령화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당 싱크탱크로서 입지가 상대적으로 탄탄한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이 원장의 장기공백을 겪은 것도 한 이유지만 민병두 의원이 원장에 취임한 뒤 민주정책연구원이 부쩍 존재감을 키웠다는 데 정치권은 한목소리다.

1월 현재 그의 실험은 가시적 성과를 냈기보단 아직은 "바람직한 시도"라는 평가 수준이다. 하지만 '계파정치에 매몰됐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제1야당을 정책정당으로 재편할 가능성을 보여준 건 확실하다. 소속 당은 물론, 본인 스스로도 '전략통'에서 '정책전문가'로 한 단계 도약하려는 민병두 의원은 어떤 정치인일까.

[그는…미소 속에 집요함 감춘 아이디어맨]

정치부 기자로 세상에 필명을 알렸다. 문화일보 정치부장(2003)을 거쳐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배지를 달았다. 아이디어가 풍부하다. 덕분에 정치입문부터 기획통, 전략통으로 불렸다. 주변에선 "집요하고 철두철미하다"고 평가한다. 

기자 시절 가다듬은 좌우명이 정치 화두가 됐다. 첫손에 꼽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은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부조하는 것이 기본적인 (언론의) 사명"이라는 뜻이다. 19대 국회 내내 금융정책과 공정거래정책을 다루는 정무위원회 소속으로 경제민주화 관련법을 다수 발의하고 통과시켰다.

최근엔 전략과 정책의 결합을 화두로 삼았다.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생활정치를 하지 않고는 정당이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며 "구호로서의 정당이 아니라 해법으로서 정당"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정책연구원장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70-80년대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지는 등 개혁성이 두드러지지만 이런 생활정치·실용성 지향에다 나이(1958년생) 때문인지 이른바 86(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그룹과는 구분된다. 국회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소위원회 복수화, 정책정당, 헌법개정, 상향식 공천 도입은 지금도 고민거리다.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이 지난해 실시한 국회의원 여론조사에서는 야권에서 입법역량이 가장 우수한 의원으로 뽑혔다. 국정감사에선 피감기관들이 국감우수의원으로 꼽았다. 민 의원은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며 "의원을 영어로 콩그레스맨(Congress man) 즉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법을 만드는 로메이커(Lawmaker)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민병두 의원 중학 시절(사진 맨 위 얼굴), 대학 졸업, 언론사 초기, 특파원 시절, 2013년 머니투데이 인터뷰(사진=홍봉진 기자), 2012년 총선 당시 모습/머니투데이

[이런 면이?…고문 피해자] 

"차에 실렸다.…정해놓은 죄명으로 억지로 엮어 넣을 수 있을 때까지 (대공분실에서) 패고 또 팼다. 그때 이후 내 몸의 좌우가 조금씩 어긋났고 자세가 불편해지는 고통을 최근에도 느끼곤 한다."('병두생각', 2011) 

1981년 '학림사건'이 터졌다.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주축인사를 당국이 기소한 사건이다. 민 의원도 이 때 경찰 대공분실에서 수사 받았다. 행당동 무학여고 앞에서 그를 체포한 사람이 고문경찰관으로 유명한 이근안씨다.

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1982년 12월 재야인사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될 때 함께 사면됐다. 1987년엔 '제헌의회그룹(CA) 사건'으로 다시 구속, 복역했다. 운동권 동지로 만난 부인 목혜정씨가 이번엔 함께 구속됐다.

민 의원은 87년 6월항쟁을 서울구치소에서 보냈고 88년 올림픽 이후 풀려났다. 이런 곡절 끝에 성균관대 무역학과를 1990년에야 졸업했다. 1991년 문화일보에 입사했을 때 32세였다. 대법원은 2012년 학림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최종 판결했다.

[키워드① 전략가]

기자 시절부터 상상력과 통찰력을 중시했다. 1998년 도입된 국회 국정감사에 대한 시민단체의 모니터링을 공동 기획했다. "국정감사를 감사한다"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한 것이 상상력에 해당한다. 통찰력은 시대정신을 읽고(해석력) 어젠다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개성은 전략가적 기질로 이어졌다.

2004년 열린우리당 창당과 함께 영입제안을 받았다. "신문지 잉크 냄새에 파묻혀 살기로" 마음먹었지만 '러브콜'은 '강권'으로 바뀌었다. "민주화운동했던 사람이 어려울 때 외면하면 안 되지 않느냐"는 요구에 마음을 먹었다.

입당하면서 17대 총선 전략기획단장을 맡았다. 정치에 갓 입문한 원외인사에게 파격적인 신뢰였다. 우리당은 지금의 새누리당(158석)과 비슷한 152석 과반의석을 얻었다. 민 의원 자신도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이후 크고작은 선거마다 전략과 기획에 뛰어들었다. '전략통'으로 불린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건 양날의 칼이었다. 전략가는 곧 '참모'로, 다시 누군가의 계파라는 이미지로 이어진다. 민심을 전략만으로 온전히 움직일 수도 없다. 열린우리당은 2006년 지방선거를 졌고, 여권이 헤쳐모여식으로 간판을 바꾼 2007년 대선(전략기획본부장)도 졌다.

민 의원은 2008년 1월21일, 그해 4월 총선을 석달 남기고 출마선언을 하면서 "전략가라는 말에는 감동이 없고 초선 의원으로서 부담스럽기조차 했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 이름 앞에 더 이상 전략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 않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생활정치인이 되도록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2014.11.04 민병두 의원 인터뷰

[키워드② 빌딩치기]

그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생활정치를 호기롭게 주장했지만 18대 총선은 시작부터 패색이 짙었다. 서울에 분 '뉴타운' 바람은 물론, 상대인 홍준표 의원(현 경남도지사)도 높은 벽이었다. 민 의원은 41.1% 득표로 패배한 후 '바닥'으로 들어갔다.

낙선인사에만 2개월을 보냈다. 하루 10시간 지역을 도는 스킨십을 가졌다. 그러기를 4년,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동대문을 지역에 전설(?)이 퍼졌다. 녹즙이나 보험, 화장품 방문판매원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일이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다. 속칭 '빌딩치기'다. 이걸 민 의원(당시 전 의원)이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는 거다. 불쑥 들어간 사무실에서 "신문 안봐요" "보험 안해요"란 반응을 듣기도 했다. 

아울러 "택시 기사들이 민병두가 타면 미터기를 안 켠다"는 말도 나왔다. 전략가라면 자칫 책상머리에서 '작전'만 구상하는 것으로 비치기 쉽다. 민 의원은 이런 통념을 깨야한다고 마음먹고 실천에 옮겼다. 공천을 따냈고, 홍준표 의원과 리턴매치에서 득표율 52.9%로 당선됐다.

[연관 검색어= 홍준표]

새누리당 대표를 지내고 5선을 노리던 거물 홍준표 의원을 침몰시킨 것은 '저격수(홍 지사 별명)를 저격했다'는 사실로 주목받았다. 동대문을은 지난 30년 간 현 야권의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이명박정부 마지막 해인데다, 홍 의원이 디도스 사건 등 정치적으로 곤란했다는 점도 한 배경이지만 무엇보다 민 의원이 발로 뛴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루 10시간 민병두처럼 뛰면 당선된다'는 '십당구락'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민 의원은 동대문구에 대해 "개발에 대한 간절함과 보존에 대한 애틋함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대문구 전농동에 산다.

[대표법안= 금융실명제법]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전격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6월부턴 제도가 크게 달라졌다. 기존 금융실명제는 명의자와 실제 거래자가 다른 가명거래를 금지하면서도 이름을 빌려준 명의자와 실제 소유주가 합의한 차명계좌는 규제하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정부는 가족·문중·친목모임 등 선의의 차명거래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비자금 통로를 열어준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2008년부터 법개정이 추진됐다. 도입 20주년인 2013년, 복수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제출됐다. 민 의원을 비롯, 김기준·박민식·안철수·이종걸·조정식 등 여야 의원들의 법안을 합친 개정안은 지난해 5월 국회를 통과, 1개월 뒤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밖에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나 납품업체에 가격 후려치기 등 이른바 갑을관계 개선법을 주도했다. 편의점의 입지와 상황에 따라 24시간 영업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강제영업 금지법도 있다. 자동차관리법 등을 고쳐 수입차 수리시 인증 받은 국내산 대체부품을 쓸 수 있게 했다. 수입차 부품값 거품을 빼고 국내 부품업체를 키워주는 것이다.

민 의원은 국산자동차에도 순정부품 외 대체부품을 쓸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추진한다. 민주정책연구원에서 밝힌 해외직판 지원법도 마련한다. 

지난해 제출한 '상가권리금 보호 특별법'도 주목된다. 잘되는 가게의 임차인을 내보낸 자리에 상가주인이 같은 업종을 한다는 등의 부당 계약관계는 제한하고, 일정기간 계약갱신 연장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그는 "과거 정치개혁이 중요한 화두였다면 대중들의 관심은 이미 '내 생활의 변화'라는 생활정치로 옮겨갔다"고 설명했다.

'1호 법안'은 2004년 제출한 정보통신기반보호법 개정안이다. 국가 주요정보시설 외 이와 연결된 개인컴퓨터도 해킹 등 사이버테러 침해 대상으로 설정, 피해를 막겠다는 사이버테러 방지법이다. 이 법안은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으로는 나이·성별·신체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장토록 하는 문화예술교육지원법 개정안이 1호다.

[사람들= 김용옥]

도올 김용옥과는 언론인 시절부터 인연이다. '기자 민병두'의 글을 좋아했던 김씨는 '대필대애'(大筆大愛)란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민 의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취임 초인 2003년 4월 인터뷰했다. 민 의원과 김씨가 함께 인터뷰어로 참석했다.

민 의원은 대체로 '친노'와 거리가 있는 '비노' 성향으로 분류된다. 다만 그는 계파 중심으로 정치를 해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각종 당직 이력에는 "필요하다고 하면 내 역할을 충분히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행보를 같이 했던 정동영 전 의원(DY)의 탈당에는 비판적이다. 

17대 국회부터 함께 활약한 박영선 전 원내대표, 김현미 의원 등과 친밀하다. 안규백 의원은 이웃 지역구 동대문갑 의원이다.

새누리당엔 대표적 협상가인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가 있다. 민 의원과 서로 실력을 인정하는 사이다. 국회에 '전략가클럽'같은 것이 있다면 두 사람 다 빠져선 안 되는 인물. 정무위에서 머리를 맞댄 김용태·박민식 의원과도 가깝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을 인터뷰하는 민병두 의원(당시 기자)/민병두 의원 제공


[이 한 장의 사진]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묘하다. 첫 구속(1981년) 이후 김 전 대통령과 같은 날 풀려났다. 김 전 대통령은 이때 미국망명길에 올랐다. 민 의원의 다음번 구속(87년)땐 "김대중과 관계를 대라"는 심문을 받았다. 

기자 시절엔 김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 문건이 확인됐다는 등 김대중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폭로기사도 썼다.

"당시 김대중정부의 왼팔, 오른팔이던 분들이 매우 섭섭해 했다. 그러나 탄압이나 불이익은 없었다. 집권 핵심들의 그런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요 주의!]

전략가라지만 패착도 있었다. 큰 선거로는 2007년 대선도, 2012년 김두관 경남지사 대선후보 만들기도 실패했다. 이유야 어쨌든 제2의 '노무현 바람'을 만들어보려 했던 민 의원의 전략은 미완에 그쳤다.

민 의원 향후 행보엔 민주정책연구원의 정치·정책적 성과가 관건이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새정치연합은 1월 현재 전국을 돌며 대표와 최고위원 선출에 나섰지만 도무지 국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선거판'인데도 당 지지율이 도리어 하락세다. 

민 의원의 지적처럼 어린이집 폭행사건, 연말정산 논란 등 생활이슈가 야당의 정치이슈를 압도하기 때문일 수 있다. 2.8 전당대회 이후 새 지도부와 호흡도 숙제다. 이런 난관을 민 의원이 어떤 '아이디어'로 돌파할지 또 한 번의 시험대다.

[잠깐! 자녀교육법]

아들(성원씨) 딸(유나씨)을 뒀다. '상상력'을 강조하는 지론 때문일까, 자녀교육에 지적 자극을 중시한다. 밤늦게 퇴근해 다시 새벽에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한 그는 부족한 시간 가운데서도 독특한 대화교육을 했다. 

"공부 잘하란 얘긴 한 적 없고 집에 가면 이야기를 해요. 무서운 이야기 시합을 하자.…두세바퀴 돌다 제가 '어이구 무서워 그만' 하면 이겼다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또 웃긴 얘기 하자고 하고. 스토리텔링? 그런 자극을 한 거죠. 지금도 가족 카카오톡 대화방에 좋은 디자인이나 시를 올리는데 딸은 고맙다고 답을 하고, 아들은 뭐. 허허." 

[프로필]

△강원 횡성(56) △경기고, 성균관대 무역학과 △문화일보 정치부장, 워싱턴특파원 △열린우리당 17대 총선기획단장 △17·19대 국회의원(서울 동대문을) △대통합민주신당 18대 대선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 △민주당 전략홍보본부장 △새정치민주연합 민주정책연구원장
민병두 의원 파워분석/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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