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의 반란, 비주류의 주류…새누리의 '입' 김영우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김영우 새누리당 수석대변인

구경민 기자 l 2015.04.08 06:18

편집자주 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아.아~ 이 부분 다시 한번 읽을께요." 

새누리당 출입 기자라면 하루에 한번 이상 통화를 하거나 브리핑석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남자. 김영우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이다. 3명으로 구성된 당 대변인단을 이끌어야 하는 그의 어깨가 무겁다. 

박근혜정부 3년차. 차기 대권에 관심이 모아지고 여야가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진용을 짜는 시점이라 대변인의 역할도 더욱 막중하다.
마이크 앞에 서는 김 대변인의 발언이 더욱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방송기자 출신답게 깔끔한 의사전달을 중요시한다. 안정된 언론 감각으로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김 대변인이 '당의 입' 역할을 맡은건 이번이 두번째다. 지난 2012년 19대 총선 직후 출범한 황우여 대표 체제에서 당 대변인 직을 수행했다.
지난해 8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김 대변인을 수석대변인으로 발탁했다. 소장파 재선의원으로서 계파 불문하고 두루 원만한 소통력을 갖췄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있을때면 김 대표는 김 대변인을 찾는다.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김 대변인이 당 대표를 포함한 지도부와 지근거리에 있다보니 '비주류의 주류'라는 얘기도 듣는다.

대변인으로서 갖춰야할 1순위 조건은 '성실함'. 그의 성실함은 수첩이 말해준다. 김 대변인은 손바닥만한 수첩을 일주일에 한 권씩 쓴다.
김 대변인의 수첩은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다. '소통하는 정치인, 진심은 통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그는  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비전을 국민과 소통하는 대변인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김영우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현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2015.2.22/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가난한 환경미화원의 아들, 선거혁명 이끌다]

김 대변인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술에 취할때면 막내인 그에게 "너는 나중에 꼭 면서기가 되거라. 출세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으로 위축될 수 있는 어린시절. 그는 오히려 가난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준 동인이었다고 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연금이 나와 온 식구가 편안해질 수 있다는 얘기에 5kg을 감량해 태권도 오도관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운동만하던 김 대변인은 중학교때 공부에 눈을 뜨게 된다. "영우야, 넌 운동도 잘하지만 공부는 더 잘 할 수 있어. 열심히 해봐"라는 여선생님의 한마디에 전교 1등 자리에 올랐다. 집에서는 효자이고 학교에선 더없이 착한 학생이지만 목표를 정하면 기어코 해내는 강단이 있었다. 

그의 끈기는 18대 총선에서 빛을 바랬다. 2008년 1월. 김 대변인은 포천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서 18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을 했다. 한 신문에서 18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끝난 지역구 중 몇 군데를 임의로 뽑아 후보자 인지도 조사를 기사화했다. 경기도 포천시-연천군 지역구에서 그의 인지도는 2%. 당내 경쟁 후보의 인지도는 80%가 넘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쁠수록 천천히 정도(正道)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지역의 어르신을 찾아가고 주중 저녁 미사까지 챙겼다. 사찰에 가서 법회 시간이 끝날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기도 했다. 
 
선거 운동의 방향을 바꾸자 이곳 저곳에서 좋은 얘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겸손하고 성실해 보인다는 말들이었다. 못마시는 술도 다 받아마셨다.
그렇게 인지도 2% 바닥에서 출발, 부정한 돈 한 푼 쓰지 않고 큰 표 차로 2008년 당선됐다. '클린선거'였다. 선거운동을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포천의 정치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고 조직 관리 면에서 많은 도움을 준 주민들은 "이런 적이 없었다. 우리 지역에서 선거혁명이 일어났다"고 기뻐했다.

[기자 출신->로스쿨->정치입문]

김 대변인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방송기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기자로서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외환위기의 태풍이 불어닥친 1998년. 당시 YTN 5년차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석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자 한 가정의 가장인 그는 새 인생을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3월 아들 유섭이도 태어났다. 

미국으로 로스쿨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외환위기로 인해 국제변호사의 활동범위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해서다. 별다른 유학정보도 없이 방송사에 사직서부터 제출했다. 그때부터 약 1년 반 동안이나 근처 도서관을 전전하며 미국 로스쿨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2000년 7월. 그는서른 다섯의 나이에 미국 일리노이주 남부 카본데일에 있는 주립대학교(SIU)로 떠났다. 매일 새벽 두세시까지 수업 준비를 위해 법률교과서를 읽었지만 숙제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건강에도 신호가 왔다. 허리 디스크로 로스쿨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도 실패는 아니었다. 김 대변인은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다"며 "나 자신을 바닥에서부터 성찰하게 만든 계기가 됐고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귀국후 그는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낮에는 홍보회사에 다니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가 다니던 홍보회사에서는 서울시 관련업무를 맡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당시 서울시장)의 인연이 맺어진게 이때다.

 
김 대변인은 서울시 홍보 업무 뿐 아니라 당시 이 전 시장에게 컨설팅 업무를 해주기도 했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니셜로 DJ, YS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 전 시장에게도 이니셜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당시 지금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역할을 했던 '인터넷 까페'를 만들것을 권유하는 등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전 시장은 본인이 설립한 '국제정책연구원'(GSI)'에 김 대변인을 영입했다. 이 전시장의 외곽자문기구이자 싱크탱크인 GSI에서 김 대변인은 정책국장을 맡아 이명박정부 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GSI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정계에 입문하게 됐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경기도 포천·연천에서 당선돼 초선 의원이 됐다. 

[그의 사람들]

김 대변인은 MB 정부 탄생과정에서 캠프에서 활동했다. 친이(친이명박)계로 분류되지만 합리적이고 원만한 성품으로 계파를 넘어 두루 교분이 두텁다.

류우익 전 장관(이명박정부  초대 대통령실장)과 가까운 사이다. 이명박정부 당시 정부 실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대변인은 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시절 제1사무부총장을 맡아 4·11 총선과 당 쇄신 작업 등을 도우면서 친박(친박근혜)계와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지난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동에 이어 친이계 의원들과 연쇄 오찬회동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만났던 '친이계 3인' 의원 중 한 명이다.

친이계 의원 중에서도 특히 조해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친분이 깊다. 새누리당 초재선 중심의 소장파 의원모임인 '아침소리'에서도 뜻을 함께 하고 있다. 2011년 선보인 조해진 원내수석부대표는 김영우 대변인의 자서전 추천사를 통해 "형제 같은 김영우 의원과 함께 나라를 위해 더 많이 일할 기회를 갖는 것이 나의 소망이고 기도제목"이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을 '은인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정 의원이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할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김 대변인은 "정 의원은 고마운 분"이라며 "18대 총선을 앞두고 현역 의원 중 유일하게 선거사무소 개소식 때 왔다. 부친상을 치렀을 때는 밤새 같이 있어줬다. 가끔씩 서로 만나 진지한 얘기를 나눈다"고 말했다. 

[연관 검색어=통일, 국방, 안보]

김 대변인은 국방과 안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의 지역구가 남한의 최전방, 한반도 배꼽에 자리잡은 경기 포천·연천이기 때문이다. 18대 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국방과 안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쌓은 것도 지역구 영향이 컸다.

그는 초선의원 시절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군 내부문건을 통해 여당의원으로서 건드리기 어려운 군 정치사찰 의혹을 폭로해 일약 국감스타로 떠올랐다.
초선의원임에도 국방 현안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방분야의 정책통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장을 중시하는 방송기자 출신이라는 배경이 발로 뛰는 국감준비를 가능케 했다는 평가다.  

그는 접경지역 국회의원으로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국방위를 거쳐 현재에는 외교통일위원회에 소속돼 통일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김 대변인은 "접경지역의 국회의원으로서 38선을 '냉전의 띠'에서 '평화와 통일의 띠'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키워드=소통]

김 대변인은 주변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성장한 정치인이다. 
GSI에서 이 전 대통령의 '대권 프로젝트'를 가동할 당시 그는 1~2주에 한번씩 핵심현안에 대해 전문가들과 토론을 했다. 김 대변인은 토론이 끝나면 요지를 한장으로 요약한 '이슈페이퍼'를 이 전 대통령에게 항상 보고했다. 부지런히 소통하는 김 대변인을 이 전 대통령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중요하게 평가한 계기가 됐다.
그는 지금도 당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 '영우통신'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직접 작성해 발송한다. 문법적으로 어색한 부분이 있어도 직접 쓴다. 
 


[대표법안= 북한인권법] 

김 대변인이 대표발의한 가장 '핫'한 법안은 최근 쟁점으로 떠오른 '북한인권법'이다. 북한인권법 제정안 4건을 통합해 지난해 11월 대표발의 했다. 새누리당 의원 34명이 서명한 이 법안은 북한주민의 생존권 확보 및 인권 증진을 목적으로, 통일부에 '북한인권자문위원회'를 설치해 북한인권 관련 정책을 뒷받침하게 했다. 

또 '북한인권재단'을 설립해 실태 조사, 인권개선 관련 연구, 정책개발, 인도적 지원 등 활동을 수행하도록 했다. 법무부에는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신설돼 북한인권 침해사례 조사 및 기록보존 등 업무를 수행한다. 

아울러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국제기구 및 외국정부 등과 협력할 북한인권대외직명대사를 외교부에 두도록 했다. 

하지만 북한인권재단 설립 여부를 놓고 여야가 이견을 보이면서 북한인권법에 대한 4월 임시국회 통과여부가 관심사다. 특히 최근 새정치연합이 기존과는 진전된 입장을 내보여 처리여부에 더욱 관심이 쏠린다.

이외에도 김 대변인은 2013년 9월 남북접경지역이 '단절'이 아닌 통일로 나아가는 '통로'임을 강조하면서 남북접경지역 공동관리위원회 구성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남북 접경지역에서 발생하는 홍수, 산불, 전염병 등 자연재해에 대해 남북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관리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은 2013년 12월31일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통일부는 이듬해 1월 결의안을 북측에 전달했다. 

환경미화원 아들 답게 2013년에는 환경미화원 처우 개선 법안 3건을 대표발의 했다. 

개정안은 지방자치단체의 청소 사업을 민간에 위탁하는 대신 지방공사·공단이나 지방 직영기업이 우선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청소업무 공영화 방식' 도입 등을 담고 있다.

이는 지자체 청소사업의 민간 위탁으로 환경미화원들이 직영기업의 70%에 불과한 임금과 상시적인 고용불안, 열악한 근로환경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 의원은 이 법안과 함께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을 어긴 업자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내용의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지자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발의했다.

[이 한장의 사진] 


김 대변인은 정치활동 외에 꾸는 꿈이 있다. 문화예술 공연에서 소외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찾아 전국을 돌면서 따듯하고 아름다운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고 지원하는 일이다. 

김 대변인은 "과거와 현재, 음악이 나에게 큰 행복의 원천이듯 자라나는 다른 어린이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요 주의]

김 대변인은 지난해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세대 교체'를 내세워 출마를 선언했지만 성과가 좋지는 못했다. 재선의원이고 당의 대변인이지만 아직까지 국민적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당내 계파를 뛰어넘어 두루 원만한 소통력을 갖췄지만, 대변인 역에 전력하다보니 지역구와 당내 정치까지 폭을 넓힐 여유가 없어 보인다.

[프로필]
△1967년 경기 포천 △포천초 △경희중·고등학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학사·석사 졸업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YTN 기자 △GSI(국제정책연구원) 정책국장 △새누리당 제1사무부총장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위원 △18·19대 국회의원 △ 현재 새누리당 수석대변인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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