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와 정치인의 '불륜', 그리고 '계파'의 탄생

[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한 유부녀의 불륜이 촉발시킨 계파 전쟁과 그 결말

이상배 기자 l 2015.09.20 14:08


'친박' 대 '비박', '친노' 대 '비노', '주류' 대 '비주류'. 여야가 너나 할 것 없이 '계파' 갈등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여당은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야당은 '혁신안'이 빌미가 됐다. 저마다 명분을 내걸고는 있지만, 갈등의 본질이 총선 공천과 대선 구도를 둘러싼 계파 간 이익 다툼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현대 정치에서 '계파'의 기원은 제7대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최초의 학벌없는 서민 출신 대통령이자 자신의 계파와 함께 탈당해 신당을 창당한 대통령이다. 여러모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닮았다.

잭슨의 뒤에는 훗날 제8대 미국 대통령이 된 노련한 정치꾼 마틴 밴 뷰런이 있었다. 밴 뷰런은 민주공화당 내 잭슨 지지자들을 규합해 미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계파'를 만들고 그 계파를 '머신'(Machine)이라고 불렀다. 권력을 제조하고 지키는 '기계'라는 의미쯤 되겠다. 그리곤 이 계파를 이끌고 탈당해 민주당을 만들고 잭슨을 1828년 대선에서 당선시켰다.

잭슨을 지지한 계파로만 꾸려진 민주당이었지만 당은 잭슨 취임 직후부터 격렬한 계파 다툼에 직면했다. 그 중심에 '페기'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미모의 유부녀 마가렛 오닐이 있었다. 워싱턴 D.C.의 유명 호텔 '플랭클린하우스' 소유주의 딸인 페기는 1816년 17세의 나이에 39세의 해군 사무장 존 팀버레이크와 결혼했다. 하지만 1828년 남편이 지중해 항해 중 스스로 목숨을 끊자 얼마 지나지 않아 테네시주 상원의원 존 이튼과 재혼했다. 문제는 전 남편의 자살이 페기와 이튼의 불륜과 무관치 않았다는 점이다.

1829년 잭슨이 대통령 취임 직후 자신의 친구인 이튼을 육군장관에 임명한 것이 논란에 불을 붙였다. 이튼의 정적들은 그가 유부녀와의 불륜으로 전 남편을 자살에 이르게 했다며 인사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러나 잭슨은 끝까지 이튼을 감쌌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였다. 잭슨 역시 레이첼 로바즈라는 유부녀와 불륜에 빠져 결투 끝에 전 남편을 죽이고 결혼까지 했다. 결투 때 박힌 총알은 평생 잭슨의 몸 속에 남아 있었다. 

'페기 이튼 사건'으로 불리는 이 문제를 놓고 내각과 민주당은 2년반 동안 양쪽으로 쪼개져 싸웠다. 존 캘훈 부통령이 중심이 된 '반(反)페기동맹'은 이튼의 퇴진을 요구했고, 밴 뷰런 국무장관이 앞장 선 '친(親)페기동맹'은 이튼을 옹호했다. 이 같은 계파 갈등은 결국 1차 개각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잭슨은 캘훈 부통령과 그 지지자들을 내각에서 축출했다. 반면 밴 뷰런은 잭슨의 후계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밴 뷰런은 1837년 잭슨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됐지만, 임기 내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정권'이란 비판에 시달리다 결국 재선에 실패하고 낙향했다. 미국 최초로 '당내 계파'를 만들고 이를 활용해 정권을 창출할 정도로 정치공학엔 능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던 셈이다. '계파의 아버지' 밴 뷰런의 재선 실패로 정권은 제9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앞세운 휘그당에게로 넘어갔다.

친박계의 '김무성 흔들기'가 심상찮다. 현실적으로 구현되기 어려운 오픈프라이머리의 대안을 내놓으라는 게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지만 이면에는 내년 4월 총선에 대한 공천 지분과 대권 구도를 둘러싼 헤게모니 갈등이 깔려있다. '혁신안'을 놓고 벌어지는 야당의 계파 갈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야당의 경우 계파 싸움을 넘어 심지어 탈당과 신당 창당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게 여당과의 차이점이다.

정당에 계파가 없을 수는 없다. 생산적 결론을 내기 위한 계파 간 논쟁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계파 갈등이 극에 달한 정당이 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낼 지는 불문가지다.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어느 쪽이 먼저 계파 갈등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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