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나흘 관전기, 신경민에 주목한 이유

[the300][김성휘의 PQ]발언시간보다 내용 설득력 갖춰야

김성휘 기자 l 2016.02.26 05:55

편집자주 정치를 읽는 데엔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 말고도 PQ(Political Quotient)가 필요할 겁니다. P와 Q는 컴퓨터 알파벳 자판 양끝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요. 좌우 양끝 사이 어디쯤에 최적의 '정치 지수(PQ)'가 있는지 답을 찾아봅니다.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중 물을 마시고 있다. 2016.2.25/뉴스1

시간만 관심이 간다. 내용은 다음 문제다. 국회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필리버스터 얘기다. 

23일부터 시작한 야당 의원들의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본회의 무제한 토론이 26일 나흘째를 맞았다. 최장 시간 기록 경신이 관심을 모았지만 정작 국회의원들이 무엇을 주제로 어떤 주장을 폈는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국회에서 직접 필리버스터를 관전하면 몇 가지 이유가 보인다. 우선 내용이 뻔히 예상된다.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대동소이다. 어차피 현재의 테러방지법안을 반대하러 올라온 의원들이다. 길게 끌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같은 말도 일부러 천천히 말하고 각종 인터넷 댓글과 관련 법령을 교과서처럼 읽기도 한다. 설득력 있는 연설이나 감동 있는 웅변이 되기는 어렵다.

그대신 얼마나 오래 말했는가 하는 '시간'만 남는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거나 생리현상을 어떻게 참았거나 하는 '이미지'만 남는다. 이러면 정작 중요한 '필리버스터를 왜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뒷전이 된다.

필리버스터에서 시간이 중요하기는 하다. 취지부터가 입법방해, 즉 입법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필리버스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일본에선 1992년 유엔(UN)평화유지군 법 저지를 위해 표결장까지 느릿느릿 걷는 '소걸음' 작전을 썼다. 프랑스에선 2006년 법안을 막으려 야당 의원들이 수정안을 무려-놀라지 말자-13만7000건 무더기로 제출했다. 한국식으로 이걸 다 병합 심사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 지연에 치중한 필리버스터는 늘 쓴맛을 봤다. 일본 소걸음 작전에도 법안은 통과됐다. 프랑스 야당은 국민 여론이 좋지 않자 수정안을 자진 철회했다. 따라서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필리버스터까지 나서게 된 명분과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일이다. 연단에 선 의원들은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25일 토론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 시간을 늘이려고 온갖 원고를 갖다붙여 지루하기만 한 텍스트가 아니었다. 에피소드가 풍부했고 기승전결이 있었다. 정보위 야당 간사 국회의원으로, 그에 앞서 30년간 기자로 일한 경험을 살렸다. 그런 가운데 국가정보원 개혁이 왜 필요한지 테러방지법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 따져봤다. 그는 국정원이 자정 즉 셀프개혁을 기대하기 어려운 조직이며 여당이 제출한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을 괴물로 만드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신 의원의 말에 동의하는지는 제쳐두자. 적어도 '시간'만큼 '내용'에 관심을 갖게 만든 건 분명했다. 신 의원은 그러면서도 오후 4시~9시경까지 약 5시간을 채웠다. 김광진 의원(5시간 33분)에 못미쳤어도 상당한 시간이다. (신 의원이 발언중 물을 조금만 아껴 마셨어도 5시간 이상 했을 지 모른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은 직권상정 제한 등 대표적 조항 외에도 상임위별 안건조정위원회, 패스트트랙(법안 신속처리제), 필리버스터 등 다양한 장치를 갖췄다. 필리버스터를 사용한 건 4년만에 처음이다. 

한국 정치를 두고 흔히 '대본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가 나쁘면 무슨 소용'이라고 한다. 그럴듯한 제도를 갖춰놓아도 정치인들이 이를 잘 소화해야 빛을 본다는 뜻이다.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마친 뒤 방청석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딸을 찾고 있다. 2016.2.25/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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