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징벌적 손배, 득과 실
[the300]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회원 등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관련 소비자집단소송법 제정안을 19대 국회 종료 전 처리를 촉구하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은 19대 국회 내에 '소비자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관련 법안 통과로 제2의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막고,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손해배상의 길이 열릴 수 있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2016.5.8/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지난 2월22일 미국 미주리주 법원은 글로벌기업인 존슨앤존슨의 땀띠용 파우더를 35년 이상 사용하다 사망한 한 여성의 유가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회사측이 유족들에게 총 7200만달러(약 870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배심원 평결을 내렸다. 전체 배상금 중 1000만 달러는 실질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이고 나머지 6200만 달러는 징벌적 성격의 손해배상금이었다. 일부 과학자들이 이 파우더에 암을 유발하는 석면 섬유가 들어있다고 지적했고, 배심원단은 회사의 암 유발 위험 고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사건이 국내에서 있었다면 유가족들이 받을 수 있는 배상금은 실질적 손해액인 1000만 달러를 넘어설 수 없다. 우리나라 법률에선 일반 제조물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석연찮은 대처로 수백명의 사망자와 피해자를 낸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보다 광범위하게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소송 남발과 기업 경영활동 위축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지만 20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고 악의적 기업에 철퇴를 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도입 논의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영미법계 국가 도입…우리는 하도급법 등에서 일부 적용= 7일 국회 등에 따르면 징벌적 손해배상은 민사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악의적으로 무분별하게 재산 또는 신체상의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불법행위를 행한 경우 가해자에게 손해 원금과 이자만이 아니라 형벌적인 요소로서의 금액을 추가로 포함시켜서 배상하는 제도다. 미국 등 영미법계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형법과 민법 체계가 엄격히 분리돼 손해를 끼친 피해에 상응하는 액수만을 보상하게 하는 '전보적 손해배상제도(실손해배상제도)'를 시행 중인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19대 국회 때부터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 '하도급법' '기간제법' '신용정보법' 등 특정 법위반에 국한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는 법 개정이 이뤄졌다. 일반 제조물에 대해서도 적용하는 본격적인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백재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도 발의됐지만 관련 정부 부처와 산업계의 우려 등을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 국회의 법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법체계와의 정합성 문제, 남소 우려, 기업활동 위축 우려 등으로 신중검토 의견을, 법무부는 민형사상 책임을 준별하고 있는 우리 민법상의 손해배상 체계에 부합하지 않으며, 초과배상책임에 대한 소송을 일반적인 민사소송절차에 따라 진행할 수 있는 지 여부 등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각각 제시했다.
◇'여소야대' 20대 국회서 본격 논의될 듯 = 징벌적 손해배상을 본격 도입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징벌적 손배 자체를 별개의 법률로 도입하는 '징벌 배상법' 도입안, 실손해배상제도를 원칙으로 하는 민법을 개정하는 방안, 그리고 19대 국회에서 시도됐던 것처럼 제조물 전반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 등이 가능하다.
제조물 책임법 개정의 경우 20대 국회에서도 다시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다. 19대 때 해당 법안을 발의했던 백재현 의원이 20대 국회 개원일인 지난달 30일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재발의했다.
이번에도 국회 통과는 만만치가 않다. 하도급법 등이 특정한 경우에 한해 징벌적 손배를 적용하는 반면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의 경우 적용대상을 일반 제조물 전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파장이 클 수 밖에 없다. 손해배상의 수준도 이미 도입된 하도급법 등에서 실제손해액의 3배 이내로 잡은데 비해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의 경우 12배 이내로 껑충 뛰었다. 확실한 억지 효과를 기대한 것이지만 역으로 보면 기업의 경영활 동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공정위, 법무부 등 관련 부처도 계속 신중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업의 악의적 범죄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어 20대 국회에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온 야당이 20대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는 점도 중요한 변수다.
백재현 의원실 관계자는 "원구성 자체도 달라졌고, 예방차원의 제도 개선이라는 점에서 19대 국회 막판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19대 때와는 양상이 다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예방 효과' 극대 vs '남소, 기업 위축'…징벌적 손배 찬반 논리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에서 불거진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공정거래 관련법령에서 이를 일부 도입하고 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인 도입 주장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징벌적 손배 도입을 놓고 불법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수단이 될 수 있어 찬성하는 의견과 막대한 손배액을 노린 '남소'의 우려로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7일 정치권에 따르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찬성하는 논리는 크게 피해자에 대한 충분한 보상, 불법행위에 대한 억제, 가해자에 대한 처벌 달성의 3가지 이유가 크게 거론되고 있다.
가해자 측면에선 가장 일반적으로 고의적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처벌은 형사법 또는 행정법의 영역인데 모든 위법 사항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징벌적 손해배상이 이런 기능도 담당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반대근거도 만만찮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소의 우려'다. 재판에서 승소하는 경우 실제 피해와 재판비용에 비해 우발적인 소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일부이긴 하지만 변호사들에 의한 기획소송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기업활동의 위축 가능성도 중요한 반대논리다.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 수위를 예측할 수 없고 과도한 배상액으로 인해 기업의 파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배심원제가 없는 우리 나라에서 판사에게 과도한 재량이 부과될 수 있다는 것도 우려도 나온다.
한편 징벌적 손해배상의 입법 방식도 제도 도입에 중요한 논란거리다. 현행 하도급법이나 신용정보보호법 등 일부 법률에서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전면적인 도입이 아닌 현행처럼 필요시 해당 법률에 이 제도를 도입하는 경우에는 필요하자는 주장이다. 다만 최근에 재발의 된 제조물 책임법외에도 개인정보보호법이나 지적재산권 관련 법령 등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법령도 상당해 이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강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특별법을 만들거나 민법상 손해배상 제도를 고쳐 일반화 시키자는 주장도 있다. 개별법마다 해당 제도를 집어 넣는 입법과정이 만만찮다는 것이다. 법원이 판결에 필요시 징벌적 손해배상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2000)가 이 사건을 다뤘다. 징벌적 손배는 실손해액보다 많은 배상금을 가해자에게 물려 억지와 처벌 효과를 키우기 위한 제도다. 미국 사례가 주로 알려져 있다.
8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미국 외에도 영국, 대만 등에 적용되고 있다. 이들 나라가 아무 범죄에나 과도한 배상액을 물리는 건 아니다. 실손해의 수십~수백배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 또한 배상액이 지나치게 커지거나 재판부와 배심원 재량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추세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이름엔 두 가지 개념이 섞여 있다. 하나는 특정한 법률에 국한하지 않고 고의적 악의적 불법행위에 무거운 배상액을 정할 수 있는 글자 그대로의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이다. 영화의 소재가 된 PG&E 소송이 대표적이다.
이와 달리 법정 배액배상제(statutory multiple damages)는 독점금지법·공정거래법과 같은 개별 법률에 규정되고, 위반 행위에 2배나 3배 등 특정배수로 배상액을 정한다. 우리나라 하도급법 등 공정거래 관련법에 도입했고, 가습기살균제 사태로 추가 도입이 논의되는 제도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라 부르고는 있지만 엄밀히 배액배상제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엔 두 가지 모두 도입돼 있다.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이 각 주 규정 차이를 극복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기준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리려면 △법률상 명시적으로 징벌적 손배가 인정될 것 △악의적인 권리침해를 입증할 명백하고 확정적 증거가 있을 것 △처벌이나 유사 행위 억지를 위해 징벌적 배상이 필요할 것 등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실손해액 10배가 넘는 배상액은 헌법을 위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른바 '한자릿수 배수' 판결사례도 있다. 배상액이 지나치게 커지면 원고(피해자)에게 우발적인 이익을 과하게 줄 수 있다는 이유다.
개별법률상 배액(3배) 배상제는 연방 독점금지법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도 카르텔(독점) 자진신고를 위축시키지 않기 위해 자진신고자는 민사소송에서 3배가 아니라 실손해액만 배상토록 하는 예외를 두고 있다.
영국은 경찰 등 공무원이 강압적, 자의적, 위헌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불법체포나 불법구금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리게 한다. 영국 의회는 추가적으로 징벌적 손배를 명문화한 입법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법률 체계는 대륙법(독일·프랑스·한국)과 영미법으로 나뉜다. 징벌적 손배 개념은 주로 영미법 국가에 해당한다. 대만은 우리나라처럼 대륙법계이며 민법상 실손해 배상원칙을 가진다. 단 공정거래법에 해당하는 공평교역법, 소비자보호법 등에 배액배상제를 두고 있다. 공평교역법은 이 법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경우 손해액의 3배 이내에서 법원이 배상액을 정할 수 있게 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징벌적 손배 제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제조물책임법 등 관련 법규에 징벌적 손배가 도입되면 한국판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물론 배액배상제가 적용된다면 배상액은 실손해액의 3배 이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인 김남근 변호사(법무법인 위민)는 "해외에도 소비자보호와 공정거래법 등에 3배 배상제가 있다"며 "제조물 책임법이나 소비자기본법상 이를 도입한다면 큰 논란 없이도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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