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하라 조정식"…'포용적 성장' 정책 드라이브 적임자

[the300][런치리포트-민주당 신임 정책위의장 사용설명서]②野도 인정한 '얘기 통하는 사람'…'걸레론'으로 상생정치

이재원 기자 l 2019.01.29 04:36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머니투데이 더300 주최로 열린 2018 대한민국 최우수 법률상 및 국감 스코어보드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사진=이동훈 기자



"조정식 의원 어디갔어? 빨리 와서 조정하고 정리하라고 해"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경기 시흥시 을)의 역할과 성격을 드러내는 한 대목이다. 지난 21일 신임 정책위의장에 임명된 조 정책위의장은 4선 국회의원이다. 정책위의장은 일반적으로 3선 의원이 맡는다는 공식을 깼다. 그만큼 당이 조 정책위의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집권 3년차, 당도 정부도 이제 성과를 내야 할 시기다. 과제도 많다. 포용적 성장을 위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관리와 조정의 대가인 조 정책위의장이 임명된 이유다. 



◇성과 내야 할 文 정권 3년차…'조정 전문가' 투입= 조 정책위의장은 평소 온건하면서도 합리적인 소통을 중요시 한다. 당 내에서도 중도·온건적 성향으로 평이 나 있다. 계파색도 옅은 편이다. 당 사무총장 시절에도 공정함으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상대 당(黨)으로부터도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지난 18대 국회 말 산업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대형마트의 영업규제 관련 법안심의를 하던 때 일이다. 당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은 소통이 어렵고 대화를 꺼리는 상대로 인식됐다.

그런 권 의원도 조 정책위의장만은 카운터파트로 인정했다고 한다. 대형마트 영업과 관련해 여야와 정부, 업계의 이견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 "빨리 와서 조정하라"며 권 의원이 찾은 사람은 조 정책위의장이었다.

19대 국회에서도 조 정책위의장은 빛을 발했다. 당시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세법을 심의할 때 일이다. 기재부 차관 출신인 김광림 새누리당 의원이나 유성걸 의원도 조 정책위의장이 자리를 비우면 "조정식 의원님 빨리 모시고 오세요. 조 의원이 자리를 비우니 진도가 안나가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력도 상당하다. 국회의 요직들을 두루 거쳤다. 20대 국회에선 전반기 국회 국토위원장을 역임했다. 건축학을 전공한 덕분에, '건축학 개론' 별명이 굳어진 계기도 됐다. 후반기 들어선 기획재정위원을 역임하는 한편, 예산결산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았다.

지난해엔 실질적인 문재인 정부 첫 예산안 협상 실무를 맡아 예산안 통과에 주력했다. 덕분에 큰 삭감 없이 문 정부 예산은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을 비롯해 야당과의 의견 조율에 있어서 조 정책위의장의 역할이 컸다는 평이 많다. 

당 내부에서도 조율과 협상의 달인이다. 장관, 차관, 교수 등 전문가 출신 의원과 논리로 대결해 관철시키는 준비성도 여러 번 뽐냈다. '혁신적 포용국가'로 정책전환을 도모하는 문 정부 3년차에 딱 맞는 성격의 정책위의장이라는 평가다.



◇스승의 '걸레론(論)' 품에 안고…"상생하는 정치"=조 정책위의장은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82학번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이 됐던 학교·학과이다. 여기에 정치인으로는 드문 전공이라 어디서든 조 의원을 얘기할땐 '건축학 개론'이 빠지지 않는다. 86세대 학번이지만 대학생 시절엔 '인간연구회'라는 서클 외에는 소위 '운동'에는 크게 투신하지 않았다.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간청 때문이었다.

졸업 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학 졸업 사실을 속이고 박봉의 프레스공으로 일하며 노동현장의 열악한 현실에 눈을 떴다. 수차례 손가락이 절단될 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자의 삶을 더 깊이 느끼게 된 계기였다. 그는 선반공장에서 목격한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보고 정치의 중요성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1992년 14대 총선 직후 조 정책위의장은 '꼬마 민주당'의 당무기획실 전문위원으로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다. 여기서 당무기획실장으로 부임해온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 전 의원을 만났다. 조 정책위의장은 제 전 의원의 정책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겨 제 전 의원이 1999년 타계하기까지 6년간 동고동락했다. 

1996년 민주당 당무기획실 회의중인 제정구 전 의원(가운데)와 조정식 정책위의장(오른쪽)/사진=조정식 의원실


"걸레가 돼 깨끗한 정치를 이뤄내겠다"던 신념을 실천한 제 전 의원을 보면서 조 정책의위장은 그를 롤모델로 삼았다. 제 전 의원과 함께 일하는 동안 '정치란 무엇인가, 그리고 정치란 과연 누구를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막막한 일에 부딪히거나 난관에 처할때면 제 전 의원을 떠올리면서 해법을 찾는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너를 죽여 내가 사는 상극의 문화였다면 새로 시작되는 천년의 역사는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의 시대가 돼야 한다'던 제 의원의 가르침대로 화합하고 상생하는 세상을 가꾸는 것이 정치인 조정식의 소명이다.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1999년은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14대 대선과 15대 총선의 연이은 패배 후 정치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오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포기하기엔 이르다면서 제 전 의원이 그의 맘을 잡아줬다. 하지만 딸이 소아암 진단을 받으면서 조 의원은 유학을 포기하게 된다. 그 시기에 공교롭게도 제 전 의원도 병을 얻어 딸 아이의 맞은편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결국 1999년 2월 정치적 스승인 제 의원이 세상을 떠나고 그해 12월에는 네 살밖에 안된 딸을 가슴 속에 묻었다.

이후 조 정책위의장은 이부영 전 의원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다 2004년 17대 총선에 제 전 의원의 지역구였던 경기도 시흥시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 내리 4선에 성공했다.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홍보위원장을, 18대 국회에서 민주당 원내대변인을 지냈다. 이어 19대 국회에서 기획재정위,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예산결산특별위 위원으로 활동했고,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선대위에서 소통1본부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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