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새로운 노무현’과 윤태영

[the300]

박재범 정치부장 l 2019.05.24 04:25

‘새로운 노무현’
23일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 주제다. 짧지만 명확하다. ‘탈상(脫喪)’과 ‘미래’를 담았다. 이 구호, 주제를 만든 게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다. ‘새로운’이 주는 단절적 의미에 불편해 하는 이도 없지 않다. ‘잊자’는 메시지로 오독한 이도 더러 있다. 

윤태영은 그러나 “추모는 추모대로 하되 차원이 달라지는, 뛰어넘는 의미”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 10년간 5월 23일은 추모, 미안, 슬픔의 날이었다. 분노, 증오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모두 과거에 종속된다. 미래가 자리잡을 여유, 여지가 없다. 함께 사는 세상은 미래인데 말이다. 

윤태영이 ‘새로운 노무현’을 떠올린 것은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강연하면서다. 노무현을 모르는 세대를 접하며 추모를 넘는 ‘노무현 정신’ ‘가치 지향’의 필요성을 느꼈다. ‘기억’과 ‘추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바보 노무현’ ‘노무현과 바보들’ ‘노무현의 사람들’은 익숙하고 편하다. ‘새로운 노무현’은 통합적, 확장적이다. ‘새로운 노무현’의 풀 버전은 “새로운 노무현, 우리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실제 새로운 것, 진보하는 것이 노무현이다. 

10년을 뛰어 넘으며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윤태영 덕이다. 노무현의 ‘입’, ‘필사(筆師)’, ‘복심(腹心)’, ‘참모’…. 사람들은 윤태영을 이렇게 부른다. 1994년 노무현의 자전적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이후 그의 드러난 이력을 보면 사실 뻔한 수식어이긴 하다. 연설담당비서관, 대변인, 제1부속실장, 연설기획비서관 겸 대변인 등 시쳇말로 ‘문고리 권력+α’다. 

대통령의 입이자 귀였고 머리이자 손이었다. 청와대를 나온 뒤에도, 노무현 서거 뒤에도 윤태영은 ‘말과 글’ 속에서 살았다. 측근에다 ‘말과 글’을 합치면 어마어마한 권력이다. 하지만 누구도 윤태영과 권력을 함께 떠올리지 않는다. ‘말과 글’을 권력이 아닌 소명과 소임으로 안 때문이다. 윤태영이 갖고 있는 기록만 업무수첩(다이어리) 100권, 포켓수첩(메모용) 500권이다. 한글 파일은 1400개에 달한다. 

하지만 독점하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누구나 사용 가능하다. 원하는 이와 공유한다. 혹자는 그 자료로 책을 쓰고 혹자는 선거에 활용한다. 예능에서도 소비된다. 인간적 호불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감(私感)은 철저히 배제한다. 노무현의 ‘말과 글’은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만난다. 적잖은 이들이 ‘기록자’ ‘대변자’이자 ‘전파자’인 윤태영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가 직접 쓴 책 ‘기록’(2014년)이나 장편소설 ‘오래된 생각’(2017년)을 보면 약간의 과장이 담길 법 한데 오히려 반대다. 담담하고 절제돼 있다. 노무현 관련 책을 노무현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소신 때문일 거다. 그래서 더 온전한 노무현이 전해진다. 

그런 윤태영의 남은 숙제가 ‘노무현 평전’이다. 연내 탈고가 목표다. 스스로 “마지막 숙제인 것 같다”고 하는 작업이다. 어찌보면 그 자신도 마지막 사람이다. 누군가는 노무현을 내걸고 의원 배지를 달았고 누군가는 사회 운동을 벌인다. 정권 교체 최선두에 선 이도 있다. 

숙제를 마쳐야, 시험을 끝내야, 진급할 수 있다면 이른바 ‘친노’중 제일 늦다.  다음 일은 항상 ‘기록(책)’이라고 답했던 그가 마지막 숙제 후 다음 일로 정치를 배제하지 않는다. 한때 안 좋았던 건강도 완전히 회복했다니 걸림돌은 없다. 사람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새로운 노무현’이라면 ‘정치인 윤태영’도 낯설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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