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1인시위부터 황교안 삭발까지…당 대표 투쟁史

[the300]역대 당대표 중 삭발 1호 '황교안'…투쟁력·리더십 시험대

백지수 기자 l 2019.09.16 17:06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오른쪽)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스1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6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삭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한 것을 '대한민국 헌정질서를 유린 했다'고 보고 저항한다는 의미에서다. 

당 대표의 삭발은 황 대표가 처음이다. 삭발은 자신을 내던져 이전과 다른 의지로 저항하겠다는 상징적 행동이다. 황 대표는 이날 옷도 정장 대신 점퍼를 입고 국회로 출근했다.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겠다는 각오가 읽힌다.

역대 당 대표들도 삭발은 아니지만 여러 방법으로 투쟁 의지를 나타냈다. 장외 노숙 투쟁이나 단식 투쟁 등이 활용돼왔다. 주로 야당 대표들이 투쟁을 해왔지만 여당 대표의 투쟁 기록도 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헌정유린, 위선자 조국 사퇴 국민서명운동 광화문본부' 개소식에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스1


◇시민과 함께 하는 거리 투쟁파=거리 투쟁은 야당 대표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다. 국회를 떠나 광화문 광장 등 시민(유권자)들의 공간으로 당 대표가 직접 나서 야당의 목소리를 전하는 방식이다. 

장외·거리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황 대표는 지난달 24일부터 매주 서울 광화문광장과 신촌 등 거리로 나갔다. 조 장관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황 대표는 4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사태 이후 5~6월 '민생대장정'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도 이같은 거리 투쟁을 했다.

거리 투쟁은 직접적으로 시민들과 만나 주장을 전달하는 만큼 강렬한 효과가 있다. 반면 '싸워도 국회에서 싸워야 한다'와 같은 비판도 항상 따른다. 국회 일정을 보이콧(거부)하고 장외 투쟁에만 전념할 경우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다는 역공도 당한다. 

2000년대 이후 대표적 장외투쟁은 2005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 2005년 12월9일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사립학교법 개정안 단독 처리에 항의하며 53일간 장외투쟁했다.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는 아예 광장에 천막을 차렸다. 청와대와 서울시청 앞 광장 등에 친 천막에서 2013년 8월27일부터 45일 동안 노숙 농성했다. 김 전 대표는 노숙 농성 도중 환갑 잔치를 천막에서 치르며 결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 발표가 예정된 2015년 10월12일 문재인 대통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친일교과서 국정화 반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문재인 대통령도 야당(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10월 거리로 나섰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투쟁이었다. 문재인 당시 대표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1인 피켓 시위와 반대 서명 운동 등을 했다.

◇'결사 항쟁' 단식 투쟁파=곡기를 끊는 단식 투쟁파 당 대표들도 있었다.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와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등이 이 방법을 택했다. 거리로 나서지는 않는 대신 국회 로텐더홀 등에서 국회 구성원들이 보는 앞에서 단식 투쟁하는 것이다.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가 2016년 9월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와 의회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며 닷새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이 전 대표는 여당 대표로서는 이례적으로 투쟁했다. 20대 국회의 '다수당'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서였다. 이 전 대표는 2016년 9월 국회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가결하자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 사퇴를 촉구하며 일주일 간 단식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지난해 12월 열흘간 국회 로텐더홀에서 단식했다. 연동형 비례대표 도입을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손 대표 옆에서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함께 단식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가 2018년 12월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예산안 합의 규탄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당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촉구 대상은 여당과 한국당이었다. 양당 안에서도 일흔을 넘긴 손 대표의 건강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국회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논의'를 본격화하자는 합의문을 체결했다.

◇투쟁 이후가 중요=이같은 당 대표의 투쟁은 이후 당사자의 정치적 명운을 가른다. 투쟁력과 리더십, 정치력을 입증하면 대선가도에 청신호가 켜진다. 다만 투쟁의 명분을 살리지 못하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사학법 투쟁으로 여당을 무력화시키면서 참여정부에 상처를 안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투쟁을 지휘하며 분열됐던 새정치민주연합과 야권을 한 목소리로 모으는 성과를 얻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초선 당대표로서 야권 분열이라는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신당(국민의당) 창당을 준비 중이던 천정배 의원(현 무소속)이나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도 손을 잡는 등 연대에 성공했다. 

정치적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사례도 있다. 이정현 전 대표가 그랬다.  이 전 대표는 당시 7일 만에 청와대 지시로 단식 투쟁을 끝냈다. 투쟁으로 얻어낸 것은 없었다. 장관 해임결의안 국회 통과에 대한 항의가 명분이었지만 박 전 대통령이 국회의 해임 건의를 받지 않을 수 있었기에 단식이 의미가 없다는 비판도 일었다.

당시 '비공개 단식', '안방 단식'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국회 본청 당대표실에서 단식하며 언론 취재에는 약 3분 정도의 시간만 줬기 때문이다. 실제 단식을 했는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비판마저 나왔다. 이 전 대표는 혈당 수치가 낮아져 병원으로 이송되며 단식을 중단했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