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고 붙여 며칠만에 부실설계... '건강한 진영의식' 흔들린다

[the300]['대한민국4.0'을 열자][3회]③축적의 시간이 없는 '당헌·당규'

정진우 기자 l 2020.03.23 18:40
(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문희상 국회의장과 의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76회국회(임시회) 제11차 본회의에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을 의결하고 있다. 2020.3.17/뉴스1



#지난 1월12일 민주평화당의 박지원 의원 등 비당권파 의원 9명이 탈당했다. 평화당을 박차고 나온 이들은 대안신당을 만들었다. 제3세력과 통합을 염두에 둔 작업이었다. 

의석이 4석으로 줄어든 평화당은 소상공인 세력과 연합을 추진하는 등 ‘선 자강 후 통합’에 무게를 뒀다. 비슷한 시기 바른미래당도 계파 갈등 끝에 쪼개져 손학규 전 대표 등 일부만 남았다. 

평화당과 대안신당, 바른미래당 등 3당은 2월11일 조건없이 통합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로 싫다고 헤어졌던 평화당과 대안신당은 한달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2주 후 이들 정당은 민생당의 이름을 달고 새롭게 출발했다.




◇며칠만에 뚝딱 당헌·당규 “어디서 봤더라?”



민생당 출범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 반이다. 당의 이념과 가치 등이 담긴 당헌을 만드는 데는 10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민생당의 당헌은 총칙 등 총 15개 항목으로, 50여페이지에 3만5000자로 돼 있다.

당헌은 수만 혹은 수십만의 당원의 생각을 모아 그 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당의 헌법’인데 단 며칠 만에 만들어질 수 있을까. 민생당 의원들 면면을 보면 답이 나온다. 민생당 의원 19명 모두 2016년 2월 안철수 현 국민의당 대표가 만든 옛 국민의당 출신이다. 

국민의당이 쪼개져 민주통합당과 바른미래당으로 나눠졌다가 원상복귀된 셈이다. 그러다보니 4년전에 만든 옛 국민의당의 당헌과 당규, 강령 등을 ‘차용’했다. 실제 민생당 당헌·당규를 보면 당시 국민의당 내용과 유사하다. 사람이 바뀌지 않은 탓에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민생당 핵심 관계자는 “국민의당 시절 당헌·당규를 잘 만들어 놓았는데, 현재 적용해야할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대정신과 가치, 미래 비전 등에 대한 고민이 없이 베낀 종이조각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현 국민의당 당헌·당규도 2016년 옛 국민의당 당헌·당규가 기본 틀이다. 지난 1월말 안 전 대표가 바른미래당을 탈당했을때부터 준비해서 한달후 국민의당 창당할 때 발표했다. 결국 민생당과 국민의당이 거의 비슷한 당헌·당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자매정당 비례위성정당, 당헌·당규도 자매품”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전진당, 보수 시민사회단체 등이 합친 미래통합당도 마찬가지다. 보수 진영의 통합은 2017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새누리당이 분열한 지 3년 여 만이다. 

통합당 당헌·당규의 내용은 모태인 자유한국당과 거의 비슷하다. 통합당 관계자는 “우리당 당헌·당규는 자유한국당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통합당의 비례대표용 자매정당인 미래한국당 당헌·당규는 통합당 내용을 축소한 형태다. 두 당의 당헌·당규 내용을 비교해보면 별 차이가 없다. 당원과 당기구 등 여러 항목에서 내용이 겹친다. 

통합당이 각 항목에 대해 디테일한 설명을 덧붙인 것만 다르다. 두 당 모두 당헌·당규 작업에 그리 시간이 많이 소요되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의 당헌·당규를 요약한 여러 버전을 당의 핵심 가지이자 규범으로 내걸고 있는 셈이다. 

범여권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도 급하게 창당하면서 초고속으로 당헌·당규를 만들었다. 이들 정당의 당헌·당규의 내용을 보면 각각 27페이지와 31페이지로 돼 있고 비슷한 내용이 많다. 다만 강령 등을 통해 각 당이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는 등 차별화했다.




◇'당헌·당규'의 정치학



대한민국 정당은 선거를 앞두고 쪼개지거나 합쳐진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선거만 다가오면 생각을 달리한다. 함께 할 땐 하나의 당헌·당규를 만든다. 헤어지면 거기서 파생된 당헌·당규를 갖는다.

이러다보니 각 당엔 당헌·당규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선수’들이 있다. 4년마다 있는 총선때 여러 당들이 출현하고 이합집산하는데, 이때 이들이 실력을 발휘한다. 만들어지는 당의 성격에 따라 약간의 윤색과 각색만 이뤄질 뿐이다. 

국회 관계자는 “각 당의 당헌과 당규를 자세히 살펴보면 겹치는 부문이 많은데, 이틀이면 만들 수 있다는 정치인도 있다”며 “추상적이면 긍정적 단어가 모두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각 당이 치열한 고민없이 ‘복붙’(복사해서 붙이는) 당헌·당규를 만든 탓에 정당의 가치와 품격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정당은 당헌·당규에 진영의 가치를 반영해야한다. 합리와 상식이 토대다. 

건강한 ‘진영 논리’ ‘진영 의식’의 출발점이자 결과물이다. 하지만 충분한 숙의 과정이 없다 보니 당헌·당규는 정당, 당원과 괴리된다. 당헌·당규 준수보다 강성 목소리가 진영을 지배한다. 합리적 대화·논쟁이 축적되지 않고 일부의 의견이 정치적 목표를 위해 반영되며 당헌·당규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권칠승 민주당 의원은 “20년전 새천년민주당 시절 당헌·당규 개정 작업을 하면서 대선을 위한 국민참여경선 항목을 넣는 것 하나에 100일 연속 당무위원회를 열었다”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일종의 합의서가 당헌·당규인데, 숙의와 축적의 시간을 통해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