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선 '기레기', 다음에선 '참기자'

[the300]['대한민국4.0'을 열자][6회- 上]대한민국 언론의 슬픈 현실

정진우 기자, 강주헌 기자 l 2020.04.04 06:00





언론이 둘로 쪼갠 '여론'…진영권력에 둥지 튼 '기레기'



‘기레기’란 단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 등장했다. 당시 기자들은 밤낮없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아니면 말고”식 ‘오보’와 ‘과장보도’가 적잖게 나왔다. 오보가 오보를 낳고 과장보도가 본질을 훼손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국민들은 그때부터 허위 사실과 과장된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불렀다. 그렇게 대한민국 언론의 신뢰도는 추락했다. 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언론은 대오각성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했을까.

아쉽지만 국민 절반은 여전히 언론을 믿지 않는다. 우리를 포함한 언론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달 18일 전국 18세 이상 성인 7293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관련 언론 보도를 신뢰하냐’고 물어본 결과 49.3%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 절반이 믿지 않는 언론, 기자들을 비롯한 언론인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신뢰성과 공정성 잃은 대한민국 언론

언론의 생명은 신뢰다. 국민이 믿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지면 낭비, 전파 낭비일 뿐이다. 신뢰의 바탕은 공정이다. 공정한 보도가 신뢰를 구축한다. 그 공정은 민주주의 실현의 핵심 가치다. 사회 현상의 중요성에 따라 의견이나 사상의 흐름을 비례적으로 표현해야한다.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는 순간 공정은 사라진다.

객관적 보도와 공익 추구는 언론의 본질이다.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은 당사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해야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뉴스를 믿는다.

하지만 대한민국 언론의 보도는 늘 공정성 논란을 부른다. 신뢰를 잃은 언론의 잘못을 부인할 수 없다. 국민들은 언론 보도를 접하며 ‘프레임(구도)’이 짜여 있다고 의심한다. 독자 항의 전화의 대부분은 “의도가 무엇이냐”다. 의도가 없는 게 다반사지만 그렇게 비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이다. 특정세력의 이익이나 의견을 옹호하거나 과하게 비난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실제 언론은 진영으로 쪼개져 있다. ‘보수 vs 진보’ 구도가 갈수록 공고해진다. 나름의 ‘진영 논리’는 갈수록 사라진다. 합리적 비판·생산적 대안 등은 보도되지 않는다. ‘막말 논란’ ‘맹목적 비난’ 등 선정적 기사가 확대·재생산된다. 타락한 진영의식이 언론 내 진영도 오염시킨다.

한쪽은 ‘망국’의 대한민국이, 다른 한쪽은 ‘천국’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정보’ 대신 ‘정쟁’만 담긴다. 국민 삶과 직결된 법안, 정책은 뒷전이다. 읽히지 않고 내 편에 도움되지 않는다. 국민들은 배제와 옹호, 둘 중 선택만 강요받는다.



◇언론이 쪼갠 여론

국민은 보수와 진보, 혹은 그 어디쯤 서 있다. 각자 진영에 속해 살아간다. 다만 통합을 추구하느냐 이분법을 강요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게 문제다. 타락한 진영의식에 갇힌 언론의 강요는 강성 지지층만 자극한다. 여론은 분열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달라진 만큼 같은 현실을 담은 기사도 다르게 읽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밤 G20화상회의에서 발표한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전략’을 다룬 같은 기사에 대한 반응이 좋은 예다. 네이버 댓글창에선 “기자가 문 대통령을 무조건 찬양한다”는 글이 주를 이루는 반면 다음 댓글창에선 “기자가 문 대통령 발언을 정확히 보도했다”는 댓글이 쏟아졌다. 언론이 진영으로 나뉜 데 이어 네이버와 다음도 어느새 ‘타락한’ 진영의 놀이터가 됐다.

‘이분법’의 선택을 강요받던 국민은 뉴미디어 환경 속 다른 길을 꾀한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간다. 자율적 선택의 결과물은 안타깝게도 확증편향이다.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찾아 즐기며 자기 만족한다. 팟캐스트·유튜브 등은 궤변에 대한 궤변으로 채워진다.

◇권력화한 언론

공정성이 맹목적 ‘가치 중립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언론은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고 발언한다. 그 속에 ‘가치’와 ‘지향’이 담긴다. 그 전제는 ‘권력과 거리두기’다. 그래야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태를 파헤친 언론에 국민들은 환호했고 박수를 보낸 게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가 없었다. 각 진영의 철 지난 얘기만 되풀이하고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규정하는 선봉대 역할을 했다. 언론 스스로 권력화됐다.

언론 스스로 부정하더라도 국민들은 그렇게 본다. 권력·정당·언론 등을 한 진영에 묶는다. 언론이 자초한 결과다. 맹목과 궤변을 기사화하며 스스로 비합리와 왜곡을 재생산했다. 그 흐름에 적응하며 합리적 의식은 둔감해졌다. ‘자정 능력’도 함께 사라졌다.

◇언론인 스스로 권력을 멀리해야

언론이 신뢰성과 공정성을 회복하려면 언론인 스스로 권력에서 멀어져야한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국회나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출신이 계속 늘고 있는 게 방증한다. 20대 국회만 따지면 박병석·정진석·민병두·민경욱 의원 등 20여명의 언론인 출신이 금배지를 달고 있다.

이번 4·15 총선에서도 새로운 언론인 출신들이 대거 도전한다. KBS아나운서를 지낸 고민정 전 청와대 대변인과 한준호 전 MBC 아나운서(더불어민주당), 배현진 전 MBC 아나운서와 박용찬 전 MBC 기자(미래통합당), 정필모 전 KBS 부사장(더불어시민당), 한겨레신문 출신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열린민주당), 조수진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미래한국당) 등 적잖다.

언론인 출신이라고 정치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다만 언론인들이 각 진영의 대변자 혹은 나팔수로 전락하는 등 ‘권언유착’의 모습을 보이면 언론의 신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각 진영에 듣기 좋은 소리, 혹은 비판이 결여된 글과 영상은 대중들을 향해 확증편향을 심화시킨다. 언론인들은 국민을 위해서 ‘공정보도’와 ‘언론자유’를 외쳐야한다. 언론인 스스로 권력이 되면 국민에게 철저히 외면당한다.
'기레기'의 탄생…언론이 둘로 쪼갠 여론




막말 정치와 유착 '따옴표 저널리즘'



“40년 애독자였던 (나는) 오늘부터 신문을 절독하기로 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달 23일 애독하던 신문의 절독 선언(?)을 했다. 홍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 ‘통합당 낙천 현역들, 만만한 곳 무소속 출마’라는 보수 매체 기사를 언급하며 “허위 날조 기사를 보고 분노한다”고 적었다.

홍 전 대표는 현역 의원도 아닌 자신을 싸잡아 도매급으로 취급했다고 분노했다. 야당 기득권 세력이 ‘정적 쳐내기 막천(막장공천)’을 해도 그대로 따라야 하냐며 항변했다.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매체에 대해 보수진영 거대정당의 수장을 지낸 홍 전 대표의 비판은 이례적이다.

이 매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홍 전 대표가 더 화를 낸 것으로 풀이된다. 오죽했으면 ‘40년 애독자’란 표현을 했을까.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월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신문을 검찰에 고발했다가 취하하는 촌극을 벌였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민주당을 빼고 찍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한 임미리 고려대 교수와 이 신문사 책임자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없었던 일로 했다.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아야하는 민주당으로선 뼈아픈 칼럼이었다. 언론과 정치인·정당은 공생관계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유권자의 표로 사는 정치인은 언론이 좋은 홍보수단이다. 여론에 민감하고 언론 기사 한 줄에도 예민하다. 신문에서 본인을 호의적으로 다루면 ‘정론지’가 되지만 자신을 비판할 땐 ‘세상에서 가장 나쁜 신문’이 된다.
(대구=뉴스1) 공정식 기자 =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무소속 홍준표 후보(대구 수성 을)가 4.15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2일 오전 대구 수성구 두산오거리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2020.4.2/뉴스1


언론도 정치인을 활용한다.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면서 영향력을 키운다. 다른 언론과 차별되는 기사를 위해 심층 정보도 필요하다. 정치인은 언론의 좋은 취재원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건전한 긴장감 없이 ‘유착’으로 변질되면 언론은 진영의식을 타락시키는 주범이 된다. 정치인들은 각 진영의 대표 선수로 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호시탐탐 입맛에 맞는 언론을 이용하려고 한다. 언론은 정치인들의 발언을 시시각각 보도한다.

정치인들은 다시 언론이 보도한 기사들을 근거로 사태의 파급력과 심각성을 부각한다. 언론은 이것을 다시 기사로 받는다. 서로 주고 받으면서 눈덩이를 점점 크게 굴려가는 셈이다.

정치 기사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언론의 ‘따옴표 저널리즘’은 이를 증폭한다. 발언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언론은 자극적인 문구의 제목을 달고 경쟁적으로 보도해 독자들의 ‘클릭’을 유도한다. 정치인들 또한 언론이 기사로 자신의 발언을 다뤄주길 바라며 자극적인 조어를 활용해 발언한다. 결국 언론은 정치인과 함께 ‘타락한 진영의식’을 키우는 역할을 자임하는 꼴이다.

국회 관계자는 “국회 의원회관에선 매일 다양한 주제로 토론회나 세미나가 열리는데, 분명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좋은 내용이 있음에도 이는 무시하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정치인 발언만 보도하는 언론이 많다”며 “언론이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기는커녕 갈등을 조장하는데 앞장선다”고 지적했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