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국회 압도적 법안 실적이 '압도적 부실'을 만든다

[the300]

정재흥 국회사무총장 비서실장 l 2020.06.12 05:45

편집자주 ‘정쟁으로 얼룩진 최악 국회’ 오명을 뒤로 하고 21대 국회가 시작했다. 정치와 언론이 잘 해온 공도 있지만 잘못된 상호작용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국회 사무처 살림을 책임지며 생생한 현장을 목도한 정재흥 국회 사무총장 비서실장이 제대로 일하는 국회, 소모적인 갈등이 아닌 생산적인 경쟁을 하는 정치가 되는 방법을 제언한다.



2020.6.11. 그래픽=이승현 디자인기자



15대 국회 4년동안 국회의원들이 1951건의 법안을 발의한 이후, 법안발의 건수는 계속 증가해 20대에 와서는 2만 4141건을 발의했다. 

법안 발의건수가 늘어나면서 처리건수도 같이 증가, 20대 국회는 3195건의 법안을 처리했다. 대안에 반영되고 폐기된 법안을 포함하면 8924건이다. 우리나라 전체 법률 숫자가 1473개이니 4년 동안에 법률마다 평균 2회 이상 개정된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6778건, 영국 178건, 프랑스 449건, 독일 138건, 일본 833건 발의됐다. 특수한 배경이 있는 미국을 제외하면 연평균 400건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는 6035건이다. '한강의 기적'같은 눈부신 실적일까.

◇발의→검토→심사 압도적 부실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려면 법안의 요지를 정리, 국회사무처 법제실에 입안, 의뢰하게 된다. 20대 국회 4년 동안 국회의원실은 사무처 법제실에 4만건의 법안을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유사한 법안이 제출돼 있거나 △헌법과 상치되거나 △개정취지나 개념이 모호해 철회한 것이 2만 건이다. 법안으로 작성해서 제출한 것이 2만여 건이다. 사무처 법제실 법제관이 약 50명이니 1년에 각자 평균 100건의 법안을 작성한 셈이다.

일부 국회의원은 충실하게 연구, 검토하고 공청회나 토론회를 거쳐서 완성도 높은 법안 구상을 한 다음 법제실에 요청하지만 충실한 준비 과정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의원은 물론 보좌관도 모르는 가운데 의원실의 하급 비서가 간단한 아이디어 수준의 구상을 제시하면서 법안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제출한 법안은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내용을 검토한다. 법안심사소위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은 전체 300명 중 201명. 20대 국회 4년 동안 국회 전체적으로 법안소위는 총 718회, 1887시간 개최됐다.

법안소위가 상정한 법안이 1만1715건이니 1개당 9.7분 정도 소요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법안소위를 통과한 법안은 상임위원회 전체 회의나 본회의에선 거의 대부분 토론 없이 찬반 표결만 하게 된다.

9.7분. 그 짧은 시간 중에는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시간도 포함돼 있다. 법안심사의 ‘나침판’ 역할을 하고 있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도 심각하다. 

발의 건수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때문이다. 대부분의 입법조사관들은 매일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출근해 일한다. 그럼에도 다양한 이해관계인과 관계 정부부처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검토보고서 마감일에 쫓긴다. 

정부의 법안 발의 방식 변화도 확인된다. 정부의 법안 발의 절차는 까다롭다. 관계부처 협의, 공청회 개최, 총리실 규제개혁심사, 법제처 심사 등 여러 절차를 거치게 돼있다. 그렇다보니 국회의원에게 부탁해 법안을 발의하는 게 확대되는 추세다. 이른바 '청부입법'이다. 

법률이 개정되면 자기 부처에는 유리하지만 타 부처 업무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반대나 수정 요구가 예상되는 경우에도 의원발의는 편리한 우회 전략이 된다. 

이는 결국 국민의 피해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정부에 이송된 법안이 시행을 기다리는 사이에 새로운 법안 개정안이 발의되는 소위 ‘공포후 시행전 법률안’이 적잖게 나오는 이유다. 개정된 법률안이 시행되기 전에 또 다시 개정되면 행정비용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블랙코미디 같은 입법행태 언제부터, 왜?

결국 압도적 법안 실적의 결과는 압도적 부실이다. 영국 의회는 본회의를 1년에 150일 개최하고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수차례 독회와 토론을 반복하면서1년에 36건을 개정한다. 

16대 총선이 있던 2000년 봄. 약 1000개 정도의 시민단체가 모여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돼 처벌 받은 사람이나 평소에 일을 열심히 안하는 국회의원을 정당의 공천이나 선거에서 떨어뜨리자는 취지였다.

문제는 국회의원의 법안발의 건수를 기준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황당한 기준이었지만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평소에 일을 안한다는 국민의 인식을 토대로 당시에는 일견 적절한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일부 시민단체들은 법안발의 건수를 입법실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법안 발의를 많이 하면 여기저기서 일 잘하는 국회의원으로 상을 받고 이를 의정보고서에 담아서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반면에 좋은 법을 만들려는 소명의식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국회의원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보좌진들은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발의 건수를 늘렸다. 쪼개기 법안, 단순용어 바꾸기, 폐기된 법안 재발의, 특정이슈 중복…. 자연스럽게 법안 처리율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16대국회 때 68.2%였던 법안 처리율은 20대 국회 때 37.0%으로 급락했다..

◇상임위 중심 취재하는 곳은… 

지난 1일 국회의원회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문 앞에는 수십명의 기자들이 진을 쳤다. 그 시각 2층 세미나장에는 취재기자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그날 세미나에 뉴스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정책·입법활동으로 연간 2만4000회 이상 개최한 공청회, 세미나가 그렇게 가치없는 것이었을까.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 정당들이 잦은 파행으로 국회 공전을 반복하는 것도 정쟁 편중 보도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 일간지 기자는 언론사 내에서 순환보직을 하므로 법안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국회에 오면 여당·야당반으로 배치돼 평소에는 거의 대부분 정당활동 중심으로 취재한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법률안 공청회를 준비하는 것보다 그때 그때 정쟁 이슈에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언론에 보도돼 자신의 인지도를 높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일간지 중에서는 머니투데이가 유일하게 상임위 중심으로 취재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취재대상의 취재효율성 차이도 있다. 정당의 대표나 최고위원과 원내대표단을 비롯한 당직자들은 취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협조한다. 교섭단체의 잘 훈련된 공보인력은 기자들에게 연일 논평과 보도자료를 쏟아낸다. 법안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관리하는 국회사무처 공무원은 사정이 다르다. 

직업공무원인 이들은 정치인과 달리 인지도를 높여야 하는 이유가 없고 국회의원의 활동을 보조하는 위치에 있다. 기자가 전화하면 받기를 꺼려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전화로는 답변할 수 없으니 궁금한 사항은 공문으로 보내라’고 한 경우도 있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질책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원·사무처·언론이 함께 달라져야

국회 인터넷 홈페이지도 선진국과 달리 국회의원의 실제 활동을 체계적으로 쉽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에는 법안명과 법안발의 건수만 있다. 

법안이 어떤 준비과정을 거쳐서 발의됐는지, 세미나나 공청회를 한 적이 있는지, 정부나 이익단체의 관련 자료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은 제공하지 않는다. 법안발의 건수가 국회의원의 입법실적이라는 관행이 유지된 데는 의안정보시스템도 의도하지 않은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일 제대로 하는 국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국회의원들이 회의를 자주 하도록 제도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다 해도 지금 같은 보도 관행이 이어진다면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할 것이다. 

법안발의 과정이나 법안 심사과정의 난맥상이 반복된 것은 언론의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부 기자들이 국회의 입법실태를 제대로 취재하고 제대로 보도했다면 국회가 훨씬 잘 작동하고 있었을 지 모른다.

국회에는 1674명의 기자들이 등록돼 있고 이중 543명이 상주하고 있다. 국회가 기형적인 입법활동 행태에서 벗어나 정상적 입법활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언론과 국회의원이 함께 달라져야 한다. 또 국회사무처는 언론과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과 정책활동을 보다 자세하게, 쉽게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해야한다. 조금씩 함께 하면 새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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