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서'에 방심한 靑-軍…'김정은 사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

[the300][뷰300]6시간 골든타임 놓쳐…"그럴줄 몰랐다" 안일한 대응

최경민 기자 l 2020.09.26 06:34
그래픽=이승현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과'가 있었지만 우리 국민 1명을 구할 수도 있었던 시간에 청와대와 군이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북한과 '물밑 접촉'이 이뤄지고 있던 상황에서 청와대와 군이 지나치게 상황을 낙관하고 방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정부에 따르면 군은 지난 22일 오후 3시30분 '북측 선박과 대치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오후 4시40분에 이 사람이 21일 실종됐던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라고 특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첫 서면보고를 22일 오후 6시36분에 받았다.

하지만 A씨는 그날 오후 9시40분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우리측은 북한군이 시체까지 태운(오후 10시) '만행'이라고 하고, 북측은 '경계 중 일어난 사고'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북측의 경우 시체는 발견 못했고 A씨가 타고 있던 부유물을 태운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남북의 주장이 엇갈리지만 명확한 사실이 있다. 우리 군은 A씨의 상황을 파악한 이후 6시간여 동안 적어도 공개된 상황을 기준으로는 아무런 조치를 안 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도 보고를 받고도 3시간여 동안 상황을 '예의주시'만 했다. 

왜 그랬을까. 군은 이를 두고 "그럴 줄 몰랐다"고 한다. 군 관계자는 "인도주의적 조치가 일어날 줄 알았다"며 "북한이 그런 만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그렇게까지 나갈 것이라고 예상 못했다"고 말했다. "북이 사살할 줄 알았으면 그러지(지켜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 10일 "(북한군이) 국경을 넘어 북한에 들어오는 이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라며 "북한의 열악한 의료체계를 생각하면 사살하라는 명령이 이해가 된다"고 밝혔다. 즉 코로나19(COVID-19)를 방어하기 위해 북한의 국경을 넘는 자들에게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래픽=이승현 기자

이같은 상황을 공유하고 있는 군이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자세로 보인다. 인명이 걸린 일은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는 게 기본이기 때문이다.

군은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언급한 내용은 북한-중국 국경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NLL(북방한계선)에 적용된 선례가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 역시 상황 파악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 안일했을까. 힌트가 25일 제시됐다. 청와대는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에 최근 교환한 친서를 공개했다. 문 대통령은 이달 8일 친서를 보냈고 김 위원장은 나흘 뒤인 12일 답장을 보냈다. 고작 사건 발생 열흘 전이다.

내용은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청와대는 "남북관계 복원에 대한 기대 내용이 담겼다"고 자체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친서에서 수해 복구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김 위원장의 모습을 거론하며 "모든 어려움이 극복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끔찍한 올해의 이 시간들이 속히 흘러가고 좋은 일들이 차례로 기다릴 그런 날들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다"고 화답했다.

남북관계 복원의 기대감을 갖고 물밑접촉이 한창이었던 상황이었다. 군이 "인도주의적 절차"를 북에 기대했던 것, 청와대가 A씨의 상황을 보고받고도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등은 모두 이같은 정황에 기초해 이해해볼 수 있다. "북한이 우리 국민을 죽일리 없다"는 공감대가 정권 내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청와대와 군이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뼈아프다. 

문 대통령은 25일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측과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사과 의사를 받은 직후여서 관련 내용을 기념사에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명이 궁색하다. 북한이 사과했다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할 군 최고통수권자가 단호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최고존엄으로 불리는 김 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사과를 했든 말든 A씨가 비극적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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