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선들이 판치는 세상…이쯤되면 독설보다 연설

[the300][우보세]

박종진 l 2021.06.04 04:30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레이스를 시작할 무렵 이준석 후보에게 어디에 주력하겠냐고 물었다. 대답은 '연설'이었다. 2004년 미국 보스턴 하버드대에서 공부할 때 친구들이 아이팟에 팝스타 음악이 아닌 버락 오바마 연설 파일을 넣어 듣는 걸 봤단다. 처음으로 "정치가 이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고 느꼈다고 한다.

단숨에 대한민국 정치판의 핵으로 떠오른 1985년생 이준석의 꿈은 '시민들이 그의 연설을 외우는 정치인'이다. 이 후보는 3일 TK(대구·경북) 합동 연설에서 "탄핵은 정당했다"고 외쳤다. "이준석의 이런 생각을 대구 경북이 품어주실 수 있다면, 우리 사이에서는 다시는 배신과 복수라는 무서운 단어가 통용되지 않을 것이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으나 문재인 정부의 부패와 당당히 맞섰던 검사는 위축되지 않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연설 승부수는 과감한 진행형이다. 당원과 시민들이 최종 성적표를 매기겠지만 똑똑한 시도다.

#연설의 힘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대선후보 존 케리 지원 연설에 나섰던 무명의 오바마는 보스턴 연설 이후 일약 스타가 돼 불과 4년 뒤 미합중국 대통령이 된다. 대중의 마음을 보듬기도 한다. "슬픔과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잔을 들이킴으로써 자유를 향한 우리의 갈증을 해소하지 맙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턴 대행진 연설은 폭력의 수렁 앞에서 시민들을 붙잡았다.

승자의 전유물도 아니다. 패배자의 존귀와 품격을 지킨다. 정파를 떠나 존경받았던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은 2008년 대선에서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오바마의 승리를 축하했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위해 특별한 순간이자, 그들을 위한 특별한 밤"이라고 추켜세운 승복연설은 어떤 당선자의 연설보다 인상깊게 기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연설이 희귀하다. 윤희숙 의원이 그저 시민의 눈높이에 맞췄을 뿐인 단 5분 발언으로 스타가 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설에 목말랐는지를 보여준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연설이 명연설로 꼽혔지만 안타깝게도 수년 만에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독설과 감언이설은 넘친다. 매일 온·오프라인에서 쓰디쓰고 다디단 말들이 쏟아진다. 매체가 퍼다 나르며 갈등과 오해만 확대 재생산된다. 정치 언어는 과잉인데 정작 건질 말은 없다. 대선이란 거대한 싸움에서는 수십, 수백 배로 증폭된다. 권모술수와 마타도어, 최악의 네거티브가 도사린다. 전초전이라는 4월 보궐선거에서 생태탕으로 그 맛을 살짝 봤다.

민심의 갈망은 무서울 정도다. 기존 정치와 단절을 요구한다. 갈라져 싸우는 남 탓과 위선의 정치에 신물이 났다. 여야 간판 주자들이 모두 비주류에 의정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준석 후보가 제1야당 대표로 거론되는 판이다. 잘나서가 아니라 민심이 떠밀어서다. 상상 못할 기막힌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갈망은 감동과 만나 폭발한다. 치열한 고민과 콘텐츠가 담겨야 감동을 준다. 곧 대권주자들이 공식 출사표를 던진다. 민심을 제대로 읽는다면 연설 대전을 준비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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