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사는 여자'…'코미디언'보다 '정치인'을 택한 윤희숙

[the300][종진's 종소리]

박종진 l 2021.08.25 15:08

편집자주 필요할 때 울리는 종처럼 사회에 의미 있는, 선한 영향력으로 보탬이 되는 목소리를 전하겠습니다.

(서울=뉴스1) 이동해 기자 =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희숙 의원이 25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경선 및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힌 뒤 퇴청하고 있다.


#"윤 의원이 사고쳤다"
25일 오전 귓전을 파고드는 정치부장의 목소리가 잠이 덜 깬 머릿속을 때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다. 윤희숙 의원이 진짜 의원직을 던졌다. 몇 시간 전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집권 여당이 밤을 새워가며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사퇴의 변은 한마디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 염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보다도 못한 도덕성과 자질을 가진 정치인을 국민들이 '정치인들은 다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하고 있는데 자기라도 그런 대상이 돼 선 안 되겠다는 의지다. 윤 의원은 "지금 여당 대선후보를 보라. 국민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낮은 도덕성 수준, 쌍욕에 음주운전에 사이코 먹방까지…그런 것을 용인하는 게 국민들이 포기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본인과 무관한 아버지의 일, 당에서도 소명을 듣고 책임을 묻지 않은 점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정아버지를 엮은 무리수가 야당 의원의 평판에 흠집 내려는 의도"라면서 국민권익위원회의 끼워 맞추기 조사를 비판했지만 스스로 정권교체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제 발언이 희화화되게 내 버려둬선 안 된다는 결심" "우리 당이 가장 날카롭게 싸울 수 있는 운동장을 허물 수는 없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면서 스타로 떠오른 자신이 '부동산 문제'로 공격 대상이 되는 상황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반응이 좋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카톡방마다 호평이 나왔다. 평소 정치 혐오가 컸던 지인들이었다. 몇 개만 소개하면 이렇다. "여야 떠나서 자기 눈의 들보는 안 보고 세상 정의로운 척은 혼자 다 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참 궁금하네요" "정말 깔끔하다" "야권에 좋은 재목이 되겠다" 등이다. 가장 많았던 언급은 "윤희숙이 국민의힘을 살린다"였다.

사실 윤 의원은 기자들에게 인기 있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초선의원으로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보여준 모습은 때로 거칠었다. 기자들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기 일쑤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던졌다. 묻는 직업인 기자들에게 오히려 물었다. 의원실에서 공부할 때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달랐다. 윤 의원과 대화할 때는 평범한 수다쟁이 누나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서 느끼는 '충격'이 종종 고스란히 전달됐다. 정치 기자들에게는 뻔해 보이는 여야의 얕은 술수조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라고 묻는 일이 많았다. 윤 의원이 평소 잘 쓰는 표현은 "후지다"였다. 우리나라 정치가 너무 후지다고 봤다.

(서울=뉴스1) 이동해 기자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5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윤희숙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 그가 기어이 죽겠다고 선언했다. 남들은 목숨 거는 의원직이다. 어떤 이들은 '사퇴 쇼'라고도 하고 내년 서울시장 선거를 노렸다고도 한다. 의원의 사직은 본회의 가결을 거쳐야 하는 만큼 어차피 통과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랬다는 말도 있다. 윤 의원이 그런 계산을 할 정도의 위인이 되는가는 별개지만 이날 "다수당이 민주당인데 민주당 대선 후보를 치열하게 공격한 저를 가결 안 해준다고 예상하긴 어렵다. 즐겁게 통과시킬 것"이라는 말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블랙코미디 명작으로 꼽히는 '죽어야 사는 여자'(원제: 죽음이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영원한 젊음을 향한 탐욕이 부른 추악한 비극을 다뤘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좀처럼 죽지 않고 버티는 게 대한민국 정치인들이다. 2년 전 김세연 전 의원이 일갈했듯 '좀비' 수준이다.

선거에 참패하고 당이 망가지고 국가가 허물어져가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한 번 더 당선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다. 국민들이 집값 폭등과 전세대란에 억장이 무너지고 백신 참사에 생계가 쓰러져도 최고 지도자는 "아쉽다" 수준의 유체 이탈 답변만 내놓는다.

벌써 19년 전, 꼭 이맘때 세상을 떠난 코미디 황제 이주일씨가 정치판을 떠나며 남긴 말은 여전히 명언이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

윤희숙은 25일 코미디언보다 정치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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