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살입법]병원과 폐기물업체 간 10년 넘는 전쟁, 승자는?

[the300]④입법을 통한 타인 시장 뺏기

서인석 l 2021.09.23 10:41

편집자주 25년 국회 경력을 가진 서인석 AP입법교육원 원장(전 보좌관)의 연재 기고 '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입법'(필살입법)을 시작합니다. 서 전 보좌관은 입법활동 전반에 대한 책을 쓰고 강의를 하며 행정사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 전 보좌관이 입법 노하우의 정수만 뽑아 총 10회에 걸쳐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서인석 전 보좌관.


입법적 리더십의 세 번째 사례는 입법을 통한 타인 시장 뺏기다. 이는 입법을 통해 타인이 갖고 있는 시장이나 기득권 또는 이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뺏기는 입장에서 보면 두 번째 사례인 입법을 통한 기존 시장 보호라는 사전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데 따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사전에 법적 뒷받침을 공고히 했더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상대에게 뺏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보건법'과 감염성폐기물 그리고 '폐기물관리법'


'타인 시장 뺏기'는 성공하기만 하면 그동안 없던 수익이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큰 매력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상대 또한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통상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지루한 '입법전쟁'의 형태를 띤다. 이와 관련 의료폐기물을 놓고 병원과 의료폐기물업계 간 10년 넘게 싸워온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의료폐기물이란 △피·고름 △탈지면·붕대·거즈 △일회용주사기나 수액세트 등 병원에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감염성폐기물'로 지정돼 전문 폐기물업자가 처리하도록 돼 있다. 의료폐기물 시장은 연간 1000억 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1000억 원 규모의 시장을 놓고 의료폐기물 업계와 병원 간에 서로 자신이 폐기물을 처리해야 한다고 입법전쟁을 이어온 것이다.

의료기관의 적출물처리시설은 과거 의료기관의 부대시설로 인정돼 설치·운영돼 왔다. 그러나 1999년 12월 '폐기물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그 결과 도심 내 주요병원은 더 이상 자체적으로 의료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관련 업체에 맡겨야 했다. 반대로 폐기물업체는 폐기물관리법과 관련한 조항 일부를 바꿈으로써 1000억 원이 넘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고 나아가 안정적으로 배타적인 영업권도 확보했다. 그야말로 입법을 통해 타인이 갖고 있던 시장을 통째로 뺏어온 것이다.

그럼 이처럼 자기 시장을 뺏기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연히 되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병원들이 뺏긴 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면 어렵게 남의 시장을 뺏어온 폐기물업체는 어떻게 할까? 이 또한 당연히 뺏기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측에 의해 물고 물리는 지루한 '밥그릇 싸움'이 전개되는 것이다. 단지 이는 물리력을 동원한 힘이 아닌 입법의 형태로 국회 내에서 각자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의원들에 의해 대리전 양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싸움과 그 형태가 조금 다를 뿐이다.

폐기물관리법 개정 이후 '학교보건법'을 둘러싼 병원과 폐기물업체간의 밥그릇 싸움은 그렇게 10년 넘게 치열하게 계속돼왔다. 폐기물관리법개정으로 자기 것을 뺏긴 병원측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2002년 2월 야당인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은 '폐기물업자에게 위탁 처리함에 따라 감염성폐기물의 이동 처리 중 2차 감염의 우려가 제기되니 2004년 12월까지 의료기관에서도 감염성폐기물처리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학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 7월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병원들은 뺏긴 것을 되찾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뺏긴 시장을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는 다시 폐기물업체로 시장이 넘어가니 병원 입장에서는 완전히 되찾아오는 게 필요했다. 관련된 조치는 17대 국회가 시작된 2004년 8월에 취해졌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허천 의원은 멸균분쇄시설을 정화구역 안에서도 설치·운영하도록 허용하자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학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상임위원회 벽을 넘지 못했다.

2005년 8월에 또 다른 조치가 취해졌다. 이번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 정봉주 의원이 의료기관 안에 설치·운영하는 폐기물처리시설을 금지행위 및 시설에서 제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학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또한 의원들의 상반된 입장으로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의 벽을 넘지 못한 채 2008년 5월 17대 국회 임기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물고 물리는 '밥그릇 싸움'


18대 국회 들어서는 2009년에 여당인 한나라당 이경재 의원에 의해 학교보건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제안 이유나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정봉주 의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개정안 발의자가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또한 17대 국회에서와 같이 법안심사소위원회의 난상토론 끝에 의원들 간 합의를 이루지 못해 임기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한편 그동안 병원 측 입장을 지지하는 개정안이 발의되더라도 침묵하던 폐기물업계는 19대 국회 들어 공격에 나섰다. 2012년 11월 2일 민주통합당 우원식 의원이 추진한 학교보건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개정안은 의료폐기물 처리시설과 같이 감염 위험이 있는 시설의 경우 200m를 초과하여 학교환경위해(危害) 정화구역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의료폐기물을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제한구역을 학교 주변 200m에서 300m까지로 더 확대하자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종합병원은 대부분 대학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설혹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병원 혹은 동네 작은 의원(醫院)이라고 해도 도심에서는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와 이웃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거리 제한을 없애지 않는 한 200m라는 기준을 300m로 늘이든 혹은 100m로 줄이든 큰 의미는 없다. 그럼 폐기물업체 쪽에서 거리제한 범위 확대를 골자로 한 개정안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선공(先攻)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확고히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공격은 대응을 낳기 마련이다. 2013년 3월 26일 민주통합당 유기홍 의원은 11명의 동료의원과 함께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의료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자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의료폐기물을 외부 폐기물처리시설로 옮겨 처리할 경우 수집·운반·보관 등의 과정에서 2차 감염 우려가 높고, 위탁소각처리에 문제가 생길 경우 즉각적인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병원측 입장을 대변한 유기홍 의원은 학교보건법 을 담당하는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통합민주당측 간사였다. 반면 폐기물업자 입장을 대변한 우원식 의원 또한 같은 당에 같은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일까? 두 법률안은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폐기 됐다. 실제로 서로 상반된 두 법률안에 대해 같은 당 소속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또 동의 서명한 의원 중 상당수가 같은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논의인들 제대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료폐기물을 둘러싸고 병원과 폐기물처리업체 간 10년 넘게 이어져온 '입법싸움'은 결국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