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들이 다 죽고 나서야 그만둘 모양이다"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이상배 l 2023.10.03 08:00
(서울=뉴스1) 박지혜 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홍익표 원내대표와 면담을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공) 2023.9.28/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1. 1589년 10월, 선조에게 상소 한 통이 올라왔다. 전주에 사는 양반 정여립이 반란을 꾸민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이 이끄는 대동계(大同契)라는 모임이 활 등 무술을 단련하고 있는데, 겨울철 한강이 얼면 한양으로 쳐들어 오려 한다는 얘기였다. 쿠데타를 통해 병조판서 신립 등 중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게 정여립의 계획이라고 상소는 주장했다.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 1000명에 가까운 사대부의 목숨을 앗아간 조선 최대 규모의 유혈숙청인 '기축옥사'(己丑獄事),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3년 동안 벌어진 이 사건에서 동인(東人)을 중심으로 1000여명의 인재가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났다. 조정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동안 조선은 외침 대비에 손을 놨다. 숙청이 끝날 때 즈음 벌어진 임진왜란에선 전란을 수습할 인재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조선 후기 호남 출신 사대부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은 것도 이 사건과 무관치 않았다.

(전주=뉴스1) 이지선 기자 = 추석 당일인 10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한옥마을이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2022.9.10/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 정여립이 정말 반란을 도모했는지 여부를 놓고는 역사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서인들이 경쟁자인 동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적극 활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괘씸죄'라고 했던가. 애초에 율곡 이이(李珥)과 가까이 지낸 서인(西人)이었던 정여립이 동인 쪽으로 갈아탄 게 서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침 정여립의 급진적 사상은 당대 공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천하는 공공의 것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정여립의 민주적 주장은 주권자가 임금인 왕정 국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영국의 크롬웰보다 앞선 공화주의자였던 정여립은 토벌대가 달려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제는 이게 혐의를 인정한 것처럼 비쳤다는 점이다. 이후 서인들의 칼끝은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모든 동인들을 향했다.

고귀한 문장력이 반드시 관대한 성품과 함께 가는 건 아닌가 보다. 이 때 사건을 맡아 동인들을 혹독하게 조사하고 무자비하게 처형해 '동인 백정'으로 불린 이가 바로 정철이다. 관동별곡 등 수많은 아름다운 글을 남긴 그 송강 정철이 맞다.

당시 동인들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거셌던지 선조에게 서애 류성룡을 탄핵하는 상소까지 올라갔는데, 선조가 "이놈들이 나라 대신들 다 죽고 나서야 그만둘 모양"이라며 류성룡을 재신임한 적도 있다. 이 때 선조가 상소에 따라 류성룡을 내치고, 이 때문에 류성룡이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하지 못했다면 임진왜란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31일 오후 서울 도심 상공에서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 축하비행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2023.8.31/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3.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인신 구속의 백척간두 위기에서 돌아왔다. 국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것이 제1야당 대표를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고갔다. 30표 이상의 당내 반란표가 주효했다.

법원의 구속영장 청구 기각 결정으로 구사일생 복귀하긴 했지만, 당내 일각에선 반란표 색출론, 숙청론이 제기된다. '해당(害黨) 행위'에 대해선 반드시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분열된 대오로 어떻게 내년 4월 총선을 치르고, 대여투쟁을 벌이며 차기 대선까지 준비하겠느냐는 논리다.

하지만 총선을 6개월 앞둔 지금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부 권력투쟁을 벌일 때인가. 총선의 최대 격전지인 수도권에서 수많은 비명(비 이재명)계 베테랑들을 내치고 과연 민주당이 총선에서 원하는 의석 수를 따낼 수 있나.

공천을 눈 앞에 둔 시점에 각 계파가 당내 헤게모니에 집중하는 건 이해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총선보다 중요한 차기 대선을 생각한다면 민주당이 택할 길은 분명하다. 당 대표는 당원들이 뽑지만,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는다. 통합과 포용의 '지도자다움'을 인정받지 못한 정치인이 과연 대선에서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제1당 지도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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