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수술대 오른 국민연금 기금운용

[the300]종합

임상연 심재현 김세관 기자, 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l 2016.12.29 09:18
삼성물산 합병찬성 외압 의혹…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손본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삼성물산(구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외압과 로비 등에 의해 찬성 의결권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확산되자 500조원이 넘는 기금운용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국민 노후를 위한 최후의 보루인 만큼 특정집단의 이해관계 등 외부 입김에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의결권 행사를 비롯해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검 국민연금 불투명한 의결권 행사 정조준=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28일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의결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장관(60·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긴급체포했다. 

문 이사장의 긴급체포는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의 특검 진술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국민연금 차원에서 합병 찬성을 의결했다고 주장했던 홍 전 본부장은 27일 조사에서는 복지부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을 번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의혹은 국민연금의 불투명한 의결권 행사가 발단이 됐다. 옛 삼성물산의 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은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민간자문기구인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기금운용본부 소속 투자위원회 결정만으로 합병 찬성을 의결해 논란이 일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을 의결하도록 외압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제일모직 지분을 42.2%, 삼성물산 지분을 1.4% 갖고 있던 이 부회장 일가는 이 합병계약으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게 됐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작년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찬성 결정하도록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로 긴급체포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특검팀은 문 전 장관이 조사 과정에서 삼성합병 찬성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기존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물증 및 주요 핵심 사건 관계인들의 진술과 배치되는 진술을 함에 따라 증거인멸 우려가 크다고보고 전격적으로 긴급체포 결정을 내렸다. 2016.12.28/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결권 사전승인등 기금운용체계 대수술 예고=국민연금 기금운용의 독립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국회가 관련법 개정에 본격 나섰다. 특히 새누리당의 분당으로 원내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기금운용체계에 대한 대수술을 예고했다. 민주당은 내년 2월 임시국회에서 추진할 개혁입법 중 하나로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 개편을 포함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홍익표 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은 전날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기회에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위원회의 독립성과 전문성, 공개성,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방침을 본격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별 의원 차원에서 이미 관련 법안들도 속속 발의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제윤경 민주당 의원은 최근 국민연금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을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에 포함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기금운용 핵심주체들의 독립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다. 

개정안은 또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금운용본부장과 실무평가위원회 위원들의 자격요건을 강화하고,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 등 자문기구를 법정화하는 내용도 담았다. 아울러 각 위원회의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하는 등 기금운용 투명성 강화 방안도 포함됐다. 

제 의원은 “기금운용본부장 한 사람의 결정에 따라 국민 노후자금이 운용·관리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며 “이를 위해 사회적 합의에 따른 의결권 행사지침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을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승희 새누리당 의원도 지난 22일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주주권행사전문위원회’란 법정기구로 개편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개정안은 기업 합병과 같이 중요한 사안은 반드시 이 위원회에서 심의·승인하고, 그 세부내용은 외부에 공개하도록 했다. 

올해 총 3018개의 국민연금 의결권 관련 안건 중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서 심의된 안건이 단 한 건도 없는 등 유명무실하게 운영되자 개선책으로 법정화를 들고 나온 것이다. 김 의원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절차상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개정안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주주권 법제화, 이번에도 소문난 잔치?



국민연금기금의 주주권(의결권) 행사는 오랜 논쟁거리다. 이 체계를 법제화하는 문제 역시 뜨거운 감자다.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도 드러난 불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은 이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정치권과 시장에서는 의결권행사 법제화가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과 관련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책임 논란을 줄일 개선안이라는 주장과 오히려 관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당초 민간 외부 전문가로 꾸려진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가 국민연금에 도입된 취지도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기업에 의사를 제대로 밝히는지를 견제,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기금운용본부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 등에 대해서만 전문위가 검토하도록 하면서 판단의 기준이 불투명하다는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전문위가 검토할 사안을 전문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권한만 부여해도 의결권행사 체계가 상당부분 투명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동안 시장에서는 전문위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승희 새누리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3018건의 의결권 관련 안건 중 전문위에서 심의된 안건은 한 건도 없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 동안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 2만5000여건의 안건 중 전문위에 부의된 안건은 총 14건에 그친다. 이중 합병과 관련된 안건은 1건이었다

전문위는 이와 관련, 지난해 10월 9명의 전문위원 중 3명 이상이 요청하면 안건을 전문위에 의무적으로 회부하도록 하는 내용의 개선안을 복지부에 제출했다. 지난해 7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민감한 사안은 전문위에 위임하던 관례를 깨고 내부 투자위원회를 열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찬성 방침을 정한 뒤다. 개선안은 1년이 넘게 복지부 책상 서랍에서 방치되고 있다.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전문위 법제화는 이보다 훨씬 강력한 내용이다. 민간자문기구인 전문위를 법적기구로 격상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이 여야 의원들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됐다. 기업합병 등 중요사안은 반드시 전문위에서 심의, 승인하고 세부내용을 공개하는 내용도 담겼다.

법안대로 전문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앞으로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에서 나타날 수 있는 책임 논란이 잦아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다. 자칫 전문위가 연금사회주의의 만능수단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연금 내부에서는 현재도 정부의 의중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반영되는 상황에서 법제화의 결과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의결권행사 법제화를 통해 정부의 기업경영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가 주목받는 것은 500조원이라는 막대한 기금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올 상반기말 기준으로 국내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에 이른다.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290개에 달한다. 국내 기업 상당수가 국민연금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기금 규모는 2043년 2500조원까지 늘어난다. 국내주식투자 비중을 줄인다고 해도 지금보다 훨씬 더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400조 세계최대 연기금 日 GPIF, 의결권 모두 위탁운영



세계 최대의 공적 연기금은 일본의 후생성연금보험 및 국민연금(GPIF)이다. 2014년말 기준으로 자산규모만 1400조원이 넘어 올해 우리나라 기금 규모인 500조원과 비교해도 3배가 넘는 자산을 자랑한다. 

독립행정법인인 GPIF는 우리나라 국민연금공단이 보건복지부 산하로 돼 있듯 일본에서 비슷한 업무를 하는 후생성에 적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 기금운용위원회와 같은 이름의 기구도 GPIF내에 설치(우리나라 기금운용위원회는 복지부 내에 설치)돼 있다. 

11명 이내로 구성되며 경제·금융 전문가 중 후생노동 대신이 임명한 인사들이 위원이 된다. 다만, GPIF의 기금운용위원회의 역할은 장기 주주가치 극대화 추구라는 기본 지침만 제시하는 선에서 제한된다. GPIF의 모든 주식투자 의결권 행사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위탁운용사가 보유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주주권 및 의결권은 개별 위탁운용사 판단에 따라 행사된다는 의미다. 물론 위탁운용사는 의결권행사 세부 가이드라인을 제정해야 하고 GPIF에 정기적으로 의결권 행사 내역을 보고할 의무를 진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약 290조원(2014년말 기준) 규모를 주무르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무원 연금(캘퍼스, CalPERS)도 세계적 연기금 중 하나다.  

미국 최대 공적 연기금인 캘퍼스는 그 어떤 부처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관이다. 내부에는 우리나라 기금운용위원회와 비슷한 관리이사회(13명)가 존재한다. 가입자대표 6인, 주정부대표 3인, 당연직 4인으로 구성돼 있다. 

이 이사회가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제정한다. 가이드라인에 따른 의결권 행사 최종 의사결정은 캘퍼스 내 주식운용실 소속 CG(Corprate Goverance)팀이 담당한다. 이때 대부분의 의결권 행사에 있어 외부 자문기관을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G팀은 매 분기마다 의결권 행사 내역을 이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미국 캘퍼스 못지않은 규모(약 220조원, 2014년말 기준)의 캐나다 공적연기금(CPP·퀘백주를 제외한 모든 근로자 및 자영업자 연금)의 의결권 결정 방식도 참고할 만하다. 복지 부처가 아닌 캐나다 재무성에 소속된 CPP는 우리나라 기금운용위원회와 같은 캐나다연금투자이사회(CPPIB)를 두고 있다. 주정부에서 추천을 받아 연방 재무성 장관이 임명하는 12명의 금융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이 이사회가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역할을 하지만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 사안별로 특수성을 고려해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둔 것.


의결권 행사는 지속가능투자위원회(Sustainable Investing Committee)에서 담당하고 다른 공적 연기금과 마찬가지로 이사회는 분기별로 투자 진행상황을 보고받는다.


국민연금 기금운용 의결권 개선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최근 발의한 김승희 새누리당 의원실 관계자는 "의결권 행사 구조로만 봤을 때 가장 큰 차이는 해외 주요 연기금들은 내부 직원들의 결정만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라며 "독립성과 전문성이 모두 보장되든지, 아니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보장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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