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보다 '누님'...김영주의 생활 정치 '레이업 슛'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김영주 환경노동위원장

박광범 기자 l 2014.07.09 07:14

"이제 더 이상 국회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평범한 사람도 꿈을 갖고 부단히, 때로는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게 노력하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19대 후반기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에 선출된 김영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프로필에는 '방송통신대 졸업'이 꼭 따라 다닌다. 그의 주위에선 "최종학력인 대학원 하나만 넣으면 돼. '서강대 경제학 석사'하면 그럴 듯하잖아"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에게 '방송통신대 졸업'이란 경력은 너무 소중하다. 농구선수 출신인 김 위원장은 대학 진학 대신 실업리그행을 선택, 30대 중후반까지 고졸로 살았다. 37살이 돼서야 방통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 대학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프로필]
김 위원장은 농구선수에서 은행원으로, 다시 노조원, 여성 최초 금융노조 상임 부위원장, 그리고 여성 정치인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만능 재능꾼이다. 가는 곳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은행원 시절,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김 위원장은 서강대 대학원에서 늦깎이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는 그가 새정치연합 내에서 손꼽히는 정책 전문가가로 꼽히게 되는 기틀이 됐다.

여성 최초로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상임부위원장을 지낸 경력도 있다. 16대 때 정계입문을 권유 받았지만 비례대표 순번에서 밀렸던 김 위원장은 17대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18대 총선에서는 전여옥 새누리당 의원에게 약 1%포인트 차로 아깝게 패하기도 했다.

2012년 4·11총선을 통해 19대 국회에 재입성한 김 위원장은 상반기 국회에서 정무위원회 야당 간사로 활동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과 서해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논란,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 등으로 여야 갈등이 첨예했지만 여야 협상을 잘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김 위원장은 정무위 간사를 지내면서 △등기임원 연봉공개 확대 △금산분리법 △차명거래금지법 등 굵직굵직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1955년 서울(59) △무학여고 △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 △서강대 경제대학원(경제학 석사) △전국금융노조 상임부위원장 △17·19대 국회의원 △통합민주당 사무총장 △국회 정무위원회 간사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 비서실장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부위원장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키워드 → 변신>
김 위원장은 변신의 귀재다. 김 의원은 남들보다 늦은 무학여중 2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슈터'였던 김 위원장은 고등학교 1,2학년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문제가 생겼다.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한 것이다. 당시 실업팀은 6개. 실업팀에서 매년 선발하는 인원은 팀당 서너 명. 전국 랭킹 25위 안에 들어야 실업팀에 갈 수 있는 상황에서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김 위원장은 농구를 그만두고 대학 진학준비를 했지만 농구는 그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신탁은행에서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 결국 김 위원장은 바늘구멍 같은 관문을 뚫고 1973년 실업 명문 신탁은행에 입단했다.

하지만 신탁은행 입단 후 김 위원장의 농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신생팀이란 팀사정과 체력적 한계로 3년 만에 농구공을 놓게 됐다.

그리고 은행원으로 변신했다. 신탁은행 약수동 지점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김 위원장은 '차별'이란 또 다른 장벽에 직면해야 했다. 지점장은 가뜩이나 바쁜데 운동선수를 보냈다며 항의의 뜻으로 그에게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오기가 발동했다. 일을 시키지 않자 지점의 막내 신입사원 옆에 앉아 하루 종일 돈 세는 연습, 주판 놓는 연습을 했다. 배움의 대가는 떡볶이였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동냥으로 일을 배웠고, 시간이 지나자 은행이 어떻게 돌아가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성실한 모습에 지점장도 차츰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대반전은 시작됐다. 지점장의 인정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새로 부임하는 지점장들마다 김 위원장과 일을 하길 원했다. 그렇게 당시 보통의 인사 이동시한인 1년 반을 훌쩍 넘겨 5년간 약수지점에서 일했다.

은행원으로서의 경험은 실물경제와 금융전문가로 걸음마를 떼게 했다.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공부에 대한 갈증도 풀었다.

은행원으로 잘나가던 김 의원은 6년차 때 노조 활동에 뛰어든다. 갓 입행한 남자행원보다 자신의 급여가 적다는 것을 우연한 계기에 알게 되면서다. 그는 여성 노조간부들이 드물던 시절, 각 은행 여성 노조간부들을 조직화해 불합리한 점들을 고쳐나갔다.

노조 활동을 하던 김 위원장에게 정치 입문 제의가 온 것은 16대 총선 때다. 여성으로 처음 전국금융노조 상임부위원장을 맡아 '남녀고용평등법'을 청원해 관철시키는 활약을 하고 있을 때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받아든 비례대표 순번은 당선권과는 거리가 먼 39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당선이 어렵더라도 당이 의석수를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로 486세대 의원들을 지원, 당선에 공헌했다. 그의 희생을 옆에서 지켜본 당은 다시 한 번 그에게 기회를 줬고, 김 위원장은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김영주 환경노동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최부석 기자

<그의 머릿속에는…'생활정치'>
'정치는 생활이다'. 김 위원장의 지론이다. 정치란 우리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게 김 위원장의 생각이다. 김 위원장에겐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바로 우리 곁의 일반생활에서 잘못된 것, 불편한 것을 개선하는 게 더 중요하다.

김 위원장의 의정활동은 유독 우리 생활과 밀접한 것들이 많다. 때문에 그는 '현장'을 중시한다. 현장에 답이 있기 때문.

'외국 동전 환전'이 좋은 사례다. 김 위원장은 지인이 일본 여행 후 각종 주전부리를 사왔는데 남은 동전 처치용이라 말을 들었다. 당장 조사에 착수했다. 은행들은 외국 동전을 수출입하고, 관리하는 데 비용이 과다하다며 환전을 거부하거나 과도한 수수료를 부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외국동전을 취급하고 있던 은행의 관리비가 연 3000만 원에 그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천공항으로 달려갔다. 입국 중인 여행객 2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86%가 외국동전 환전 경험이 없었고, 41%가 외국동전 환전요구 거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김 위원장은 그 길로 금융당국과 은행들에 국제공항 등 개항장에서라도 외국동전 환전을 의무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은행연합회는 2006년 11월부터 홈페이지(www.kfb.or.kr) 내 금융자료실을 통해 은행별로 외국동전 환전이 가능한 지점을 소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머니투데이 더300과의 인터뷰에서도 "환노위원들은 자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현장정치, 생활정치를 강조했다.

매년 황사와 미세먼지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데, '특수마스크'를 사회적 약자들에 제공하는 아이디어도 있다. 김 위원장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도 무상으로 주고, 노인들에게는 지하철도 무료로 탑승시켜주고 있다"며 "생활과 직결된 것에 돈이 지급돼야 한다. 황사가 많은 봄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특수마스크를 줄 수 있는 생활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표법안 → '프랜차이즈법'>
19대 국회 전반기 최대 화두는 '경제민주화'였다. 그 중심에 정무위가 있었고, 김 위원장은 야당 간사로 정무위를 주도했다.


김 위원장의 대표법안은 일명 '프랜차이즈법'이라 불리는 '가맹사업거래공정화에 관한법' 개정안이다. 김 위원장은 2012년 개정안을 대표발의해 프랜차이즈법 개정의 물고를 텄다.


개정안은 이후 정무위 논의과정 등을 통해 편의점 등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에게 24시간 영업 강요를 금지하고, 가맹점주의 예상 매출액 및 산출근거 서면제출을 의무화했다.


또 소위 '개미투자자'로 불리는 일반주식투자자들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주가조작사범과 내부미공개정보 이용자는 금액에 관계없이 최소한 부당이득을 본 만큼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사진=김영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제공

<이 한 장의 사진 → 남녀고용평등증진 공로로 '국민포장' 수상>
노조 활동 시절 직장 내 남녀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남녀고용평등법'재·개정을 위해 국회를 제 집 드나들듯 했고, 그 싸움은 길었다.

7~8년 이란 기간 동안 '동일가치·동일임금'을 주장한 끝에 '여행원제도 완전폐지',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의 내용이 '남녀고용평등법'에 들어갔다. 결국 그의 공로는 1996년 '국민포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주위에는>
정치적 계파는 딱히 없다. 하지만 동료의원들과는 두루두루 친하다. 그 스스로도 '인복 하나는 타고 났다'고 생각할 정도다. 정무위 시절엔 '금융권의 마당발'로 환노위에 오자 '노동계의 마당발'로 통하고 있다.

의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지낸다. 가깝게 지내는 새누리당 의원들도 있는데, 정책을 가지고 경쟁할 때는 치열하게 논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그를 '김 의원'보다 '누님'이라고 부르는 남성 의원들이 더 많다는 전언이다.

<요주의 → 노조와 경제전문가의 간극>
김 위원장은 국회 입성 후 한동안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노조' 출신이란 꼬리표가 늘 그를 따라 다녔다. 그때만 해도 노조 출신이라고 하면 '머리에 띠 두르고 투쟁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었다. 그의 이력에 있는 대학원 경제학 석사 학위는 보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묵묵히 그 편견에 맞서 싸웠다. 의정활동으로 보여줬다. 한쪽 논리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안 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법안으로 부당성을 알렸다.

이제는 오히려 여당 의원들은 물론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파행하는 것보단 대화를 통해 문제에 대해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환노위원장을 맡은 이후 김 위원장은 고민이 커졌다. 여당과 야당의원들을 중간에서 조율하려다 오히려 양쪽에서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노조'와 '경제전문가', '노동'과 '경제', '당위성'과 '합리성'. 수많은 도전과제 속에서 김 위원장이 중심을 잡아내는 것이 후반기 환노위의 최고 관전포인트라는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여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야당 의원들이 서운할지는 몰라도 (여야가) 함께 가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