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배임죄' 기준…늘어나는 '무죄' 판결

[the300][MT리포트-배임죄①]

황국상, 김종훈, 송민경(변호사) 기자 l 2018.01.15 08:24
고의성·범죄 구성요건 등 위법행위 판단 어려워
법원 '경영상 판단' 존중…배임죄 범위 좁아져
일부에선 "형사 처벌보다 손해배상으로 풀어야"


"배임죄로 기소할 때는 처음부터 무죄가 선고될 것을 각오한다. 명확한 기준이 없어 판사의 성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재경지검 검사의 말이다. 배임죄의 유무죄 기준이 그만큼 모호하다는 얘기다. 배임이란 경영자 등이 사익을 위해 임무를 위배한 것을 말한다.

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재계 총수 또는 CEO(최고경영자)들에게 잇따라 무죄가 선고되면서 검찰의 배임죄 기소를 두고 '이현령 비현령'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법원은 '경영상 판단'을 존중해 날로 배임의 범위를 점점 좁게 해석하고 있는데, 검찰은 여전히 막무가내로 재판에 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배임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유다. 일각에선 배임을 형사 처벌이 아닌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다스리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모호한 '배임'의 기준


8일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6년 형법상 횡령·배임죄 재판의 1심 무죄율은 5.4%로 2007년 3.7% 이후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다. 2016년 전체 형사사건 1심 무죄율이 3.4% 수준이었음에 비춰 횡령·배임죄에 대한 무죄율이 유독 높은 셈이다.

횡령과 배임 가운데 특히 기준이 모호한 배임죄 재판에 무죄가 집중된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절도나 강도 등은 범죄 구성요건이 단순해 유무죄를 다툴 여지가 거의 없지만 배임죄와 같은 재산범죄는 위법행위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범행의 고의가 있는지 여부 뿐 아니라 실제 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하는지 여부부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관의 판단에 따라 좌우될 여지가 가장 큰 죄목이 배임죄"라고 했다.

형법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3자에게 이익을 취하도록 함으로써 타인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 '배임죄'로 처벌토록 하고 있다. '타인의 사무'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 등 죄를 구성하는 요건이 모호하게 기술돼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배임죄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이 내세우는 주된 논리는 "경영상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이 같은 논리를 점점 폭넓게 받아들이는 추세다. 2004년 7월 대법원이 대한보증보험 경영진의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 판단을 내린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대법원은 대한보증보험이 1995~1998년 삼미금속, 한보철강 등에 지급보증을 제공하는 과정에 관여한 전직 대표이사들의 배임 사건을 '경영상 판단'이란 이유를 들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 판결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고의에 따른 배임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확립됐다.



◇'혁신경제' 가로막는 '배임죄'

최근 법원이 주요 배임 사건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데에도 '경영상 판단' 원칙이 작용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해 1심에서 계열사 지분 인수와 유상증자 참여와 관련한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 이석채 전 KT회장도 다른 회사 주식을 고가에 인수했다는 의혹에 대해 배임 혐의로 기소됐으나 1,2,3심 모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해외 자원개발 투자 과정에서 5500억원대 국고 손실을 초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배임 혐의로 기소된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 역시 1,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과도한 배임죄 적용이 신규 투자 등 경영진의 과감한 의사결정을 가로막아 경제의 혁신성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경제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온 것도 무죄율 상승의 원인으로 꼽힌다. 배임 수법이 지능화·고도화되고 있다는 점 역시 한가지 이유로 거론된다. 한 대검찰청 간부는 "기업의 횡령·배임 범죄 수법이 과거엔 주로 비자금 중심이었지만 이후 임원 과다급여 지급을 거쳐 지금은 계열사 부당지원이 대부분"이라며 "경영상 판단인지 배임인지 가리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배임죄의 태생적 모호성을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한다. 일각에선 아예 배임죄를 폐지하고 사기죄를 대신 적용하거나 민사적 구제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윤승영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미국 워싱턴D.C. 변호사)는 "배임죄의 요건을 법으로 구체적으로 정하기 어렵다보니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일삼고 법원은 '이현령 비현령 판결'을 내린다"며 "배임을 모호한 형사법으로 다스리는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나 집단소송, 주주대표소송 등 민사적 방식으로 구제하는 것이 더 실효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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