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한 언니' 한정애가 꿈꾸는 평등복지국가

[the300][대한민국 국회의원 사용설명서]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박광범 기자 l 2015.05.01 05:59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 1991년 어느 뜨겁던 여름날. 산업현장의 작업환경 점검을 위해 부산 남구 문현동에 위치한 목재가공공장을 찾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현재의 안전보건공단) 소속 여직원에게 '봉투'가 건네졌다. 순간 목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점검'이란 이름 앞에 봉투를 내밀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공장장님, 저 이 봉투 받았습니다.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주신 셈 치고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 시원한 음료수나 수박이라도 사주십시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말밖에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이 여성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꿈꾸는 '노동이 존중받는 평등복지국가의 대장정'은 이날부터 시작된다. 이후 한 의원에게 산업안전공단은 일반 직장이 아니었다. 부산과 울산, 경남 창원 등에서 근무하며 산업현장의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치열하게 일했다.

1997년 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한 의원은 현장 노동자들을 위한 기술지원에 부족함을 느낀다. 더 많은 지식에 대한 갈망을 느낀 한 의원은 유학을 결심한다. 쌓은 지식을 산업현장에 전달하고픈 욕심 때문이었다.

영국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된 기쁨도 잠시,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IMF위기가 발목을 잡은 것. 정부의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닥쳤고, 공단은 한 의원의 유학건을 불허했다.

한 의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1999년 여름. 더 이상 유학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영국 노팅엄대학으로 자비 유학길에 오른다.

[키워드-①어머니의 사랑]
고수동굴이 유명한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한 의원의 유년기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광산업에 종사했던 한 의원의 아버지는 1973년 겨울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한 의원이 9살 때의 일이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남겨진 한 의원의 어머니는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그랬듯 억척같이 아이들을 키우셨다. 어머니의 친정인 부산으로 이사해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

항상 강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머니도 힘들었음을 안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의 수첩을 본 것이다. 어머니의 치열했던 하루하루가 적혀있던 수첩의 수많은 글귀 중 '힘들었다'는 대목은 한 의원의 마음에 바늘처럼 박혀있다.

한 의원이 기억하는 유년시절의 그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그 중 한 가지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어버이날을 맞아 글짓기 시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적어 반 전체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기억이다.

이후 중학교에 들어간 한 의원은 인생의 큰 위기를 맞는다. 중학교 3학년 때 신장염이 발병한 것. 학교를 휴학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큰 차도를 보이지 않자 결국 한 의원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병원생활을 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에서도 이렇다 할 의료적 소견을 내지 못했고, 급기야 '생을 포기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만 듣고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가 없으니 퇴원하시고 애가 먹고 싶다는 거 있으면 그냥 먹게 해주시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해 주세요"

한 의원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머니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한 의원은 당시 세상 온갖 종류의 약을 다 먹어본 것 같다고 회상한다. 분말, 검고 동그란 환약, 알약, 캡슐, 걸쭉한 엑기스, 맑은 액체….

삶에 대한 희망이 꺼져갈 즈음 '극약처방'을 체험했다. 어머니가 용하다는 경북 영주의 한 약사에게서 지어온 정체불명의 '흰 가루약' 극소량을 물에 타 먹었다. 소화제와 함께. 한 의원은 지금도 그 약의 정체를 모른다고 했다. 그 약을 복용한 후 한 의원은 거짓말처럼 건강을 회복했다. 한 의원은 약이 아닌 어머니의 정성 덕분이라고 믿는다.

건강을 회복한 한 의원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건강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투병으로 또래보다 2년 늦은 학교생활을 했지만 같은 반 친구들은 '언니'하며 한 의원을 따랐다. 고등학교 땐 한 의원이 속한 무리가 10명 넘게 몰려다니니 주위에서 '개떼'라는 별명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사진=의원실 제공


[키워드-②노사모가 이어준 인연]
한 의원이 정치인 '노무현'을 주목하게 된 것은 남들과 비슷한 '5공청문회'때였다. 공단에 입사한 1989년 9월26일. 당시 국회 노동위원회 야당 3인방이었던 노무현, 이해찬, 이상수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한 의원이 근무 중인 공단을 방문했다. 국정감사를 위해서였다. 당시 막내 직원이었던 한 의원은 국감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문 밖에서야 국회의원 노무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의원은 그때 그 당당한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영국 유학시절인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물리적 한계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이하 노사모)'에 가입했다. 해외 노사모도 있었다. 영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노사모의 오프라인 만남이 성사되기도 했다.

당시 해외 노사모의 대표지기는 미국에 있었는데, 그를 비판하는 그룹과 옹호하는 그룹간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한 의원은 옹호하는 쪽이었는데, 논쟁하는 과정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됐다. 대표지기를 비판하는 쪽의 남자였다. 며칠을 게시판에서 논쟁하다 자신의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고 판단해 메일을 보냈다.

그 메일을 주고받은 이가 바로 지금의 남편인 강동완씨다. 그렇게 아이디 '영국에서'(한 의원)와 '강하리'(강씨)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노동자의 대변인으로]
한 의원이 '노동자의 대변인'으로 변신한 것은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부터다.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3년 8월말 귀국해 공단에 복직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공단의 조직 문화는 그대로였다.

20대 초반 여성들은 사무실 위계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했다. 남자 상사들은 마치 '사환' 부리듯 이 여성근로자들을 부렸다. 담배 심부름, 은행 심부름은 물론 물 심부름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한 의원은 불편했다.

"부장님. OO씨가 보고서 작성하느라 많이 바쁩니다. 보고서가 저렇게 쌓여있지 않습니까. 저렇게 바쁠 때는 개인적인 용무는 직접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돌한 말이었다. 한 의원은 상사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무척 당돌하고 까칠한 직원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몇 번 '들이 받은' 경험 이후 한 의원은 부당한 것, 원칙에 맞지 않는 것, 불합리한 사안들에 대해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한 의원은 근본적으로 조직문화를 바꿔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2005년 노조위원장 선거에 뛰어들었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돌입한 것이다.

한 의원은 이후 한국노총 산하 전국공공노동조합연맹 수석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처음엔 상급단체 선거 출마는 생각도 없었고, 자신의 역량도 못 미친다고 생각했었다. 결심의 동기는 단 하나였다.

"조직문화를 바꾸고, 노동자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외연이 조금 더 확장된다 한들 두려울 게 뭐 있겠느냐"

한정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0일 오후 서울 대방동 기상청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사진=뉴스1제공


[대표법안]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출신의 전공을 살려 19대 국회 전후반기 모두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환경오염사고의 책임 대상을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 및 대기·수질·폐기물·토양·소음진동·해양 등 오염 유발시설로 규정하고, 정신적 피해를 포함한 인적·물적 피해를 배상범위로 명시하는 내용의 '환경오염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률(환경책임법)' 제정안이 눈에 띤다.

2007년 충남 태안, 2014년 전남 여수에서 발생한 기름유출사고 등 환경오염사고의 신속한 피해 보상을 위해 추진된 제정안은 '오염원인자 부담원칙'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시설 설치·운영 과정에서 환경오염이 발생한 경우 과실여부를 불문하고, 특별한 면책사유가 없는 한 해당 시설의 사업자가 그 피해를 배상토록 했다. 피해자에게 피해입증에 필요한 시설 설치 및 운영 관련 정보 청구 및 열람권도 부여했다.

제정안은 지난 1월 더300(the300)이 주최한 '제1회 대한민국 최우수법률'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쌍둥이 등 다태아 산모 지원을 위한 일명 '다태아법'도 눈길을 끈다. 다태아법은 고용보험법, 근로기준법, 모자보건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법 개정안으로, 다태아 임산부에게 30일 추가된 출산전후휴가 급여를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기존법에 따르면 모든 임신 근로자는 90일의 범위에서 출산전후휴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엔]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계파색이 강하지도 않다.

같은 여성 의원들과 친한데, 나이가 같은 서영교 의원과 한국노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전순옥 의원과 특히 친하게 지낸다. 전 의원의 경우 한국노총의 전태일재단 후원 등으로 인연을 맺었고, 비례대표 의원으로 19대 국회에 나란히 입성하기도 했다.

이용득 새정치연합 최고위원과는 한국노총 시절 인연을 맺었다. 이용득 최고위원의 선거를 도와 이 최고위원이 한국노총위원장에 취임하는데 일조했고, 한 의원은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을 맡았다.


[이 한장의 사진]

한정애 의원실 제공


어머니의 사랑으로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었던 한 의원이다. 어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열심히 공부해 대학 졸업 학사모를 씌워주는 것 밖에 없었다. 투병으로 남들보다 2년 늦은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동생들 사이에서도 엇나가지 않고, 사춘기 시절을 무사히 넘겨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요주의]
한 의원은 요즘 20대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서울 강서을 지역 챙기기에 전념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의도 국회와 지역구를 오간다. 한 의원의 부지런함에 강서을 출마를 준비하는 타후보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다.

그렇다고 한 의원의 재선이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당 지역위원장 경선에서 같은 비례대표 초선의원인 진성준 의원에 밀려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강서을 지역이 차기 총선 '선거구 분구' 후보지로도 거론되지만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다. 지역위원장 경선 패배를 딛고 재선에 성공하느냐가 한 의원의 정치 인생에 최대 기로가 될 것이란 분석이다.

[프로필]
△충북 단양(1965) △부산 해운대여고 △부산대 환경공학과 △영국 노팅엄대학교 산업공학 박사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노조위원장 △한국노총 공공연맹 수석부위원장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 △19대 국회의원(비례)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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