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물장수' 홍문표, '농어민 지킴이' 의원 되기까지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 홍문표 새누리당 의원

박다해 기자 l 2015.07.29 05:45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제 명함은 앞면말고 뒷면을 봐주세요"
홍문표 새누리당 의원은 첫 인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명함 뒷면엔 "농어촌·농어민이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강한 나라가 된다"고 적혀있다. 그의 사무실인 의원회관 336호에도 같은 문구가 걸려있다.

 

농민이 되기 싫어 고향을 떠났지만 '농민의 아들'이란 피는 속일 수 없었다. 그는 2번의 국회의원을 지내며 단 한 번도 상임위원회를 바꾸지 않고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옛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 농어민들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데 집중해왔다.

[무작정 상경  "서울 못가면 죽을 것 같았다"]

1962년 중학교 졸업시험을 막 끝낸 충남 홍성의 한 까까머리 소년은 상경을 결심한다. 농사일을 하던 부모님 곁에 있다간 꼼짝없이 가업을 이어가야했다. 농민으로 고향에만 남기는 싫었다. 더 넓고 큰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각종 서류와 돈을 보관하던 나무궤짝에서 5000원짜리 몇 장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상경을 반대하는 부모님 몰래 집을 나서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탔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강북구 삼양동에서 매일 새벽 물지게를 지고 물을 배달했다. 물배달이 끝나면 신문배달과 학원아르바이트가 기다렸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를 해나간 그는 남들보다 1년 늦게 한영고등학교 야간반에 입학한다.


[대학교 1학년, 신민당에서 꿈꾼 정치]

그가 정치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건국대학교 농과대 1학년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법학가이자 소설가였던 고려대학교 유진오 박사에게 들은 철학강의가 계기가 됐다. 농업공부만 하던 그에게 사회문제부터 철학까지 망라하는 유 박사의 강의는 충격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을 이어나가곤 했다.

1967년 신민당 대표위원이 된 유진오 박사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자 그는 유 박사의 선거운동원이 된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심을 처음 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는 신민당 청년부장, 조직부장, 청년국장을 거치는 등 군입대를 미루면서까지 현실 정치를 배워나간다. 

구체적으로 국회의원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12대 국회의장인 이재형 의장의 의전비서관을 맡으면서다. 할아버지와 이재형 의장의 인연 덕에 4급 의전비서관으로 일하게 된 그는 1급 정무수석 비서관까지 지낸다.

[4전 5기로 들어온 여의도]

여의도에 입성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는 1988년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청양·홍성 지역에 처음 출마한다. 그러나 첫 당선은 2004년 실시된 17대 총선이었다. 처음 출사표를 던진 지 무려 16년 만이었다.

자연스레 그의 출마사(史)는 한국의 정당사(史)와 궤적을 같이 한다. 1990년 민주정의당, 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선언과 복귀, 소속당의 분당으로 인한 이회창 총재와의 만남, 한나라당의 탄생까지…그는 탈당한 사람들이 빠진 뒤 남은 인원으로 '꼬마 민주당'을 두 번이나 만들며 고집스럽게 버텼다. 지금도 오로지 당선을 위해 당적을 바꾼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내 손으로 탈당하거나 입당하거나 왔다갔다하지 않고 지금까지 정치활동을 한 게 아들한테 가장 자랑스러워. 변절과 배신이란 용어가 제일 싫은데 사실 여기는 공천여부에 따라 쉽게 변절하는 곳이잖아.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치하면 잘 하는 거야"

[키워드→농민의 아들]

충남 홍성군 홍동면 문답리에서 태어난 소농민의 아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일컫는다. 어린 시절에는 농사꾼이 되는 것이 싫어서 무작정 상경했지만 뿌리는 농촌이란 사실을 되새기며 산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라는 한 상임위만 고집하는 이유도 그렇다. 17대 때는 농어업대책특위를 맡기도 했다.

그는 선거용 단발성 정책만으로는 산업의 근간인 농업을 살릴 수 없다고 믿는다. 대신 장기 정책으로 △기후변화와 생산통계를 토대로 국가가 직접 지역별 농작물 수급량을 정한 뒤 조절해나갈 것 △휴경지를 국가가 임대해 국내산 축산사료를 재배할 것 △복합영농을 통해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일 것 △토양 등을 파악해 수출에 적합한 목재를 만들 수 있도록 맞춤형 산림지도를 만들 것 등을 제시한다.

그가 직접 발의해 국회를 통과한 법 가운데 가장 보람을 느꼈던 법도 '면세유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과 '농기계임대법'(농업기계화 촉진법 개정안)을 꼽는다. 면세유법은 농사를 지을 때 일반석유의 3분의2 가격인 면세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농사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그는 농민들의 면세유 사용시한을 영구적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17대 국회 당시 재정경제위원회(현 기획재정위원회)를 거치며 적용 시한을 5년 연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는 19대 국회에서도 일몰 기간이 다가온 면세유 적용 시한을 10년 더 연장하는 법을 발의한 상태다.

기본 천만원대를 호가하는 값비싼 농기계를 구입해도 정작 1년에 열흘 남짓 사용하는 것을 감안, 농기계를 임대해서 쓸 수 있는 '농기계임대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농기계 구입은 그동안 농가부채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지적돼왔다. 면세유법과 함께 농사비용을 줄이는 대표적인 법안인 셈이다.

그는 이밖에도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 △농업용수 관리 △신품종 개발을 통한 종자주권 강화 △수출 중심 농어업으로의 전환 등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홍문표 국회 예결위원장과 여야 간사인 이학재 새누리당 의원, 이춘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해 1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예결위원장과 여야 간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예결위 심사를 이틀 연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왼쪽부터 이춘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홍문표 예결위원장, 이학재 새누리당 의원. /사진=뉴스1


[키워드→예결위원장]

"목욕탕도 쫓아가고 단골 이발소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설득하려고 그렇게 쫓아다녔어요"

국회는 지난해 12월, 12년 만에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12월2일) 1시간을 남겨두고 예산안을 의결했다. '국회선진화법' 개정 이후 처음 예산을 심사하는 해였다. 여야는 가리지 않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뤄내는 등 좋은 선례를 남겼다며 극찬했다.

당시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맡았던 홍문표 위원장은 예산안 시한 내 처리를 위해 '발로 뛰었다'고 강조했다. 상대 의원들의 설득을 얻어내기 위해 목욕탕과 이발소 앞에서 ‘뻗치기’도 감수했다. 그렇게 발로 뛴 것이 예산안 통과에 톡톡한 효과를 가져왔다.

예결위원장 시절 그가 가장 중점을 둔 목표는 국토균형발전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몸담으며 '지역쏠림현상'이 얼마나 심한지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인수위원회에서 예산안을 두고 스터디를 했다는 그는 "가스보급률이나 수도보급률, 하다못해 장애인편의시설 설치비율 등까지 거의 모든 부문에서 충청권이 꼴찌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양쪽이 다 배부른 상태에서 와서 똑같이 배분하자고 해야지 한명은 배부르고 한명은 배고픈데 똑같이 배분하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라며 "국민이 화합을 하려면 국토균형발전이 최우선이다. 거기에 중점을 두고 지역사업 등을 꼼꼼히 살펴봤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대한하키협회



[키워드→하키협회장]

홍문표 의원은 2009년부터 대한하키협회 회장을 맡았다가 지난해 11월 정의화 국회의장이 선정한 '겸직금지'명단에 포함, 사직을 권고받아 직을 내려놨다. 그러나 현재 하키협회 측이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놀라운 점은 올해 2월 대한하키협회는 하키인 3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홍문표 의원의 사직권고를 철회해달라는 청원서를 정의화 의장에게 전달했다는 것. 홍 의원이 2017년으로 예정된 임기만이라도 채울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홍 의원이 처음 하키협회 회장을 맡게 된 것은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회 시절 임태희 당시 비서실장의 제안 때문이었다. 각 종목 협회 회장들의 투표로 대한체육회 회장을 뽑는데 하키협회 회장만 공석이었다는 것.

"왜 공석인가 사연을 들어보니 하키가 선수 수는 축구랑 똑같지, 따로 장비도 있지, 한 번 훈련하고 경기하는데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더라. 그런데 비인기종목이다보니 예산이 없었다. 선수들이 실력은 뛰어난데 전지훈련도 못 가고 있었다. 심지어 국제대회를 나가는데 팀 닥터가 못 따라가고 후보선수도 없이 딱 1진 선수들만 간 거다. 그런데 한 선수가 다리가 부러졌다. 닥터가 없으니까 경기를 포기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결국 논의 끝에 상대 팀이였던 호주 닥터한테 진료받고 붕대를 감고 뛰었다. 우승은 못했지만 2등을 하더라. 짠했다"

그는 하키협회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예산 지원은 정말 안 되는데 선수들은 독종이라 매번 메달도 따오고 하니까 하키협회를 없앨 수도 없고 한다더라. 그래서 하키협회장을 맡았다"

홍 의원은 하키협회장을 맡은 뒤 그는 전지훈련비 등 각종 예산을 지원받는데 집중했다. 매년 필요 예산과 이유를 목록으로 작성해 후원 단체를 설득했다고 한다. "아무리 절약해도 매년 20억원의 예산은 필요하더라. 그래서 이번에도 후임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사진제공=한국농어촌공사



[연관 검색어→농어촌공사]

18대 총선에서 탈락한 뒤 그는 2008년 농어촌공사 제5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마사회 회장직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그는 농어민들을 위한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 농어촌공사 사장직을 수락한다.

홍 의원은 농어촌공사에서 근무하며 ‘농지은행’제도를 처음 건의한다. 나이가 많이 들거나 농기계가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을 은행에 담보로 맡긴 뒤 다달이 생활비를 연금형식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또 농지를 부채농가에 장기, 저리로 임대해 경영정상화를 유도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농어촌공사 직원 가운데 50%를 의무적으로 농촌출신으로 채용하는 파격적인 정책도 화제가 됐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농촌에서 일한 경험이 없으면 정책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단 이유였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역정을 내기도 했으나 농촌현장을 알아야 농어촌공사도 발전할 수 있다는 소신으로 설득, 관철해내기도 했다.

[그의 사람들→이회창]

이회창 전 총리는 그와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그러나 좋은 기억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홍 의원이 몸담고 있던 '꼬마 민주당'이 와해될 때 그는 김대중과 이회창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이회창을 택한다.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 이후 그는 조직담당 부총장만 4년 넘게 하며 이 전 총리의 대선준비를 돕는다. 부실한 지구당위원장을 교체하는 궂은 일도 그의 몫이었다. 당시 교체작업에 반발한 지구당위원장으로부터 협박을 받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집 앞에 낙서는 약과였다. 오물을 투척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칼을 숨기고 그를 만나러 온 지구당위원장도 있었다.

홍 의원의 부모님도 그를 따라 물심양면으로 이 전 총리의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한다. 그는 암투병 중이던 아버지는 투병 도중에도 틈틈이 이 전 총리의 당선 여부를 묻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적으로 돌변한다. '차떼기정당' 사건으로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그가 자유선진당을 창당, 그의 지역구인 홍성·예산에서 18대 총선에 출마한 것이다. 그를 믿고 4년 동안 당 조직을 정비하는 데만 집중했다던 홍 의원은 여전히 그 때의 배신감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지금도 "그 때 정신 제대로 안 붙잡았으면 우울증 걸렸을 거야"며 쓴웃음을 짓는다.

[대표법안]

*FTA 무역이득공유제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홍문표 의원이 19대 국회 입성 직후 처음 발의한 법은 바로 '무역이득공유제'를 법제화하는 ‘자유무역협정 특별법’ 개정안이다. 무역이득공유제는 FTA 체결 이후 이익을 보는 산업이 이익 일부를 FTA로 손해를 보는 농업 등과 공유해야한다는 내용이다. FTA로 발생하는 산업 간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취지다.

개정안은 ‘농어업인 지원 종합대책’을 통해 FTA 이행으로 순이익이 발생한 분야를 조사하고 해당 이익의 일정 부분을 환수하도록 했다. 해당 개정안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를 통과했으나 여러 산업계 등의 반대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국민연금법 개정안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현재 국민연금기금의 운용 방법 중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 ‘증권의 대여’를 삭제함으로써 공매도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공적연금기금으로서 국민연금기금이 바람직하게 운용될 수 있도록 제한한다는 취지다.

홍 의원은 증권시장에서의 공매도는 주가가 하락할수록 그 이익이 커지므로 시세조종 등과 연계한 불공정거래행위를 수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 이를 제재하기 위해 해당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한 장의 사진]

메모가 가득 적혀 있는 홍문표 의원 손바닥/ 사진=박다해 기자


홍 의원은 종종 손바닥에 메모를 한다고 한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등을 보다가 기억해둘만한 내용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적어둔다는 것.

홍 의원은 "내가 모르는 것들이 나오면 당장 이렇게 적어두는 방법 밖에 없다. 뉴스를 듣거나 토론회 등을 가거나 할 때 생소한 부분이 나오면 손바닥에 많이 써놓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종 이 메모를 두고 보좌관 등과 점심먹을 때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사실 농업에 대해서 별 관심이 다들 없잖아요. 그래서 종종 질문 써갖고 와서 물어보곤 해요. 밥 먹을 때 이야기하는게 제일 자연스러워서 메모 보면서 이야기하지"

/사진=박다해 기자



[요주의!]

그의 경력만 훑으면 여느 중진급 의원 못지않다. 17대 국회에선 유일한 충청권 한나라당 의원으로 ‘태안유류오염사고 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협상을 이끌었다. 초선에겐 이례적인 일이었다. 19대 국회에선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맡아 예산안을 법정 시한 내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의 인지도는 경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여의도 입성이 늦은 탓에 연륜에 비해 낮은 선수도 단점이다. 최근 제1사무부총장을 맡은 것을 계기로 '충청권 의원'에서 벗어나 외연을 확대해나갈 필요가 있다.

[프로필]

△충남 홍성 △한영고 △건국대 농화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국회의장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한나라당 사무부총장 △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충남도당 위원장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간사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위원회 인수위원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대한하키협회 회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19대 국회의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19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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