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질된 의제 규정

[the300][정재룡의 입법이야기]

정재룡 국회 수석전문위원 l 2017.09.09 08:00

편집자주 정재룡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을 통해 전하는 국회와 입법 스토리

 법제에서 ‘의제’라는 것이 있다. 사전에서는 본질은 같지 않지만 법률에서 다룰 때는 동일한 것으로 처리하여 동일한 효과를 주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민법에서 실종 선고를 받은 사람을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개별 법률에 의제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벌칙 적용에서의 공무원 의제와 인·허가 등의 의제가 가장 많다. 

전자는 법률에서 정한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를 형법 등으로 처벌할 때 공무원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후자는 개발행위 등에 관하여 하나의 주된 인·허가 등을 받으면 관계법률에 규정된 다른 인·허가 등을 함께 받은 것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허가 등의 의제는 다른 규정의 적용을 사실상 배제시키는 것이므로 의제가 본래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서 변질된 의미로 쓰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014년 6월 「지역균형개발 및 지방중소기업 육성에 관한 법률」과 「신발전지역 육성을 위한 투자촉진 특별법」의 통합으로 「지역개발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인·허가 등의 의제 규정을 둔 대표적 법률이다. 이 법률에 따라 인·허가 등이 의제되는 법률은 무려 51개에 달하고 한 개의 법률에 의제되는 인·허가 등이 여럿인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의제 대상 인·허가 등이 총 113개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종래 2개 법률에서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 법률에서 새로 의제 대상으로 추가된 인·허가 등이 무려 37개나 된다. 당초 이 법률안은 정부가 제출한 것인데, 국회심사과정에서 인·허가 등의 의제 규정은 아무런 검토나 논의도 없이 정부 원안 그대로 통과되었다. 이처럼 법률에 인·허가 등의 의제 범위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당초 인·허가 등의 의제는 대규모 개발사업 추진의 편의를 위하여 도입되었으나 최근에는 영업행위처럼 개발사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허용되는 등 남발되고 있다.

인·허가 등의 의제는 하나의 주된 인·허가 등을 받으면 관계법률에 규정된 다른 인·허가 등을 받지 않고도 받은 것으로 보도록 함으로써 관련 규정의 적용을 사실상 배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입법상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인·허가 등이 의제되면 집행에 있어서 의제처리되는 인·허가 등의 법적 효과 부분이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아 일선 행정공무원이나 민원인 모두 그 효과의 구체적 내용에 관하여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의제되는 인·허가는 의제처리된 이후에는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고, 제3자의 이익이 침해된 경우 그 권리구제에 미비점도 있다. 따라서 그동안 인·허가 등의 의제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동처분 등 몇 가지 개선방안들이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그 방안들은 논리적으로 미흡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에는 인·허가 등의 의제 제도 자체를 폐기하고 대신에 협의를 거쳐 관계 행정청이 개별 인·허가 등의 행정처분을 직접 하도록 하는 특례규정을 두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통설 및 판례는 인·허가 등의 의제에 있어 의제된 인·허가 행정처분의 실재를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 방안은 관련 인·허가에 대하여 처분성을 부여하고 관계 법률에 따른 관리·감독 등을 허용하는 것이다. 또, 조의 제명도 더 이상 “다른 법률에 따른 인·허가 등의 의제”가 아니라 “다른 법률에 따른 인·허가 등의 신속한 처리 등”으로 제시되었다. 아무튼 그만큼 현행 인·허가 등의 의제는 문제가 많아서 개선이 필요한 법제인 것이다.

그런데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하 “토지보상법”) 이외에 110여개에 달하는 법률에서 방만하게 허용하고 있는 공용수용권 관련 규정에는 대부분 사업인정 의제라는 것을 두고 있다. 이는 인·허가 등의 의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사업인정 의제는 「토지보상법」에 따른 사업인정 절차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여기서 사업인정은 개인의 재산권을 강제로 취득하는 것을 정당화할 정도로 공익적 필요성이 인정되는 사업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절차를 사업시행에 대한 행정처분이 있으면 그냥 생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인·허가 등의 의제의 경우는 주된 인·허가 등의 행정청이 관계법률에 규정된 다른 인·허가 등의 행정청과 협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는 반면, 사업인정 의제는 그와 유사한 절차가 따로 없이 그냥 사업시행에 대한 행정처분이 있으면 사업의 공익성 검증을 면탈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된다.

특히 심각한 것은 민간사업자의 수용권 행사에도 사업인정 의제가 허용된 경우가 총 47건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업시행에 대한 구체적인 행정처분이 아니라 민간사업자가 그냥 특정 구역을 지정하기만 해도 사업인정 의제할 수 있도록 하여 과도한 사유재산권 침해 소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할 때 지금과 같은 사업인정 의제 법제는 조속히 폐기하고 최소한 그 법률의 소관 부처 장관이 사업인정 절차를 밟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멀쩡한 법규정을 사실상 사문화시키는 의제 제도는 지극히 행정편의적 법제로서 정부 주도 입법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명실상부 의원 주도 입법 시대다. 이제는 과거 통법부 시대 유산은 청산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인·허가 등의 의제 규정을 신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자력 안전정책에 대한 우려나 전원개발사업에 따른 주민의 재산상 손해 및 환경문제 등 때문에 현행법의 인·허가 등의 의제 규정을 삭제하려는 「전원개발촉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2건 발의되어 있다.

법제처는 인·허가 등의 의제 제도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오래 전부터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해왔고 지금도 연구용역을 실시 중에 있다. 오는 11월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국회도 인·허가 등의 의제 규정을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이를 폐기하고 대신 인·허가 등의 통합적 검토와 절차 간소화라는 '인·허가 등의 의제' 제도의 당초 취지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재룡 국회 교육문화관광위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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