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슬픈 태극기

[the300]

박재범 기자 l 2019.02.22 04:00
매주 토요일 광화문은 태극기 부대의 해방구가 된다. 어르신들은 넓은 광장을 누빈다. 거칠 게 없다. 모든 것을 쏟아낸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내뱉는 육두문자는 기본이다. 영화 대사를 빗대면 ‘지금까지 이런 자유는 없었다’. 집회·결사·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만끽한다. 이른바 ‘빨갱이’의 전유물이었던 헌법상 자유 등을 이젠 ‘태극기’가 누린다.

태극기 옆 환호는 없다. 열정보다 궁상이 느껴진 때문이다. 연배를 떠나 그 자체가 ‘올드’하다. 복장, 구호 등 분위기는 1970년대를 연상시킨다. 요새 말로 하면 ‘핵아싸(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란 뜻의 아싸에 핵을 붙여 만든 신조어)’다. 안타까운 것은 그 분들이 토요일의 재미를 알았다는 점이다. 희열을 느낀다는 이도 있다. 시내에서, 광장에서 인생 처음으로 발언하면서 얻는 쾌감이다. “너희가 무엇을 아느냐. 내가 세상을 오래 살아봐서는 아는데…”.

평일엔 카카오톡으로 소통하고 유튜브를 공유한다. ‘젊은이들과 다를 게 없다’ ‘세상 살아온 경험을 더하면 더 낫다’ 등 스스로 자신감을 고취시킨다. 그 광화문의 힘은 여의도로 전해진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뒤흔든다. 혁신, 개혁, 합의, 존중 등의 단어는 설 곳이 없다. ‘막말’이 정체성을 대변한다.

대여 강경 투쟁을 주문한다. 한국당은 눈치 보느라 바쁘다. 한국당 중진의원조차 “태극기 부대의 목소리를 당 지도부가 외면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일견 넋두리로 들리지만 실제론 태극기에 기댄다.

5·18 망언을 질타하는 목소리보다 5·18 망언에 대한 사과를 비판하는 요구에 귀를 기울인다.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알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국가 권력의 존재 이유, 국민에 대한 예의 등을 고민하지 않는다. 가짜 뉴스를 함께 소비하고 재생산하느라 분주하다.

‘블랙리스트’ 논란 등 현 정부의 각종 실정에 대한 공격 아이템이 고작 ‘내로남불’에 불과한 것은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지난 2년간 보수의 몰락을 경험한 결과가 이 정도라는 게 안쓰럽다.
제1 야당 전당대회에 ‘담론’ ‘철학’은 없다. ‘빨갱이’ ‘좌파’ ‘문재인’ ‘북한’ 등을 빼면 스스로의 키워드는 없다. 과거의 탄핵을 부여잡고 박근혜만 떠올린다. 과학적 사고는커녕 합리적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북한으로 보낸 귤 상자 안에 뭐가 들었을 지 모른다” “북미정상회담 날짜는 문재인 정부가 만든 것” 등은 일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국당 내 일반적 인식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에 서 있지 않다. 둘 다 지나온 과거다. 산업화를 이끈 분들이 민주화 세대를 향해 반감을 드러낸다고 해서 나라는 발전하지 않는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80년대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라고 자부한다고 해서 사회는 진보하지 않는다. ‘원조 논쟁’은 장충동 족발집 등 식당에나 있는 거다. 그마저도 장사와 무관하다.

우린 헌 대한민국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분단 이후’ ‘종전 이후’ 한반도의 새로운 세상이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변화가 두렵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해선 미래를 맞을 수 없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전 총리는 저서 ‘보수의 유언’에서 "진정한 보수는 원칙을 지키며 끊임없이 개혁한다"고 했다. 진보도 다를 게 없다. 발버둥을 쳐도 1970년, 1980년을 다시 살 수 없다. 100년전, 임시정부는 한 세력을 위한 게 아니라 새로운 나라, 미래를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미래가 살아갈, 새로운 100년도 그렇게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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