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봄날은 갔다

[광화문]

김준형 정치부장(부국장) l 2015.06.15 07:46
29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2015.5.29/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영록의 모친 백설희가 부르고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까지 리메이크했던 '봄날은 간다'는 올봄 여의도 최고 화제곡이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여권의 위기감이 깊어가던 4월초 정두언 새누리당의원이 쇄신파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먼저 목청 높여 한가락을 뽑았다. 이대로 가면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정치권 격언이 그대로 현실화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한달 뒤 새정치민주연합 최고회의에서 '정청래 공갈발언'으로 싸움판이 벌어진 상태에서 울려 퍼진 '봄날~'은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봄날은 간다'는 원래는 지키지 않을 약속만 던지고 떠나간 못된 남자 놈에 대한 회한을 담은 '연애가'이지만, 뜨거운 여름이 온 걸 모르고 있다간 진땀쏟고 탈진할 지경에 이를 거라는 '계송'으로 더 제격이다.
 
가 버린 봄날을 아쉬워해야 하는, 그래서 빨리 계절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부친을 통해 '정치 조기교육'을 받았을 때의 국회는 국회도 아니었다. 대통령의 사촌형부 김종필이 얼마전 회고록에서도 돌이켰듯이,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같은 거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쫓겨가던 시절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가며 국회의원을 규합해 정적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는 '항명'을 했다가 경을 쳤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행정입법' 남용을 견제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여야가 표결로 통과시킨 걸 대통령의 뜻을 거르스는 입법부의 '도발'로 여기는게 청와대의 생각인 것 같다.
이른바 '쇄신파'에 속하는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은 식사자리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이야기가 미치자 "시대가 바뀌었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당청관계에서)지금 아쉬운게 누구죠?"라고 반문했다. 목소리라도 낮출법 하건만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계파를 떠나 '제왕적 대통령'은 과거에나 가능했던 말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제대로 할 수 있는게 없는 상황이 돼서 개헌을 해야 할 지경이다.


15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회법 개정안을 정부로 송부한다. 박대통령의 고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야당과 협상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엉뚱하게' 국회법 시행령을 달고 들어온 유승민 원내대표를 곱게 볼 수가 없고, 이를 추인해준 김무성대표를 포함한 '미래권력'에 대해 쐐기를 박아놔야 조기 레임덕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을 할 법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유승민 원내대표가 행정부의 시행령 남용에 대한 문제의식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무슨 새정치민주연합의 '세작(細作:간첩)'이라고, 야당과 공모해서 일을 꾸민게 아니다. 야당이 아무리 반대해도 일단 법안을 상임위-본회의에 넘기면 되고, 단독으로라도 처리하면 그만이던 '여당의 봄날'은 갔다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봄날을 밀어낸 요인 중의 하나로 지목받는 국회선진화법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신념이기도 했다.)

행정입법에 대한 의회의 수정변경권한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은 권력분립 경계를 오가는 '행정입법'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이다. 입장에 따라, 학자에 따라, 혹은 사안별로 의견이 갈릴 수 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다고는 해도, 법률이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되듯 행정규범이 법 취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겠다는 입법부의 논리를 행정부가 '대놓고' 거부할 명분은 크지 않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상임위에서 시행령 개정요구를 쏟아내 국정이 마비될 것이라고 청와대는 말하지만, 상임위원회에서 여당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정이 마비된다는 건 명백한 과장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마자 '손봐야 할 시행령 14개'를 발표해  청와대의 우려에 힘을 실어주는 '치기'를 보였지만, 야당 단독으로 '손 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행령을 고쳐야 한다는데 여야가 동의할 정도의 사안이면 고치는게 맞다. 그게 싫다면 의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는게 솔직한 일이다.  일부에서 만들어낸 '입법독재'라는 말 뒤에는 '선출된 권력'을 부정하고 70년대식 행정부 독재의 '봄날'을 그리워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행정부를 오래 출입한 기자들은 노련한 공무원들이 시행령을 통해 법을 요리하는걸 잘 알고 있다. (☞탐사리포트 시행령 공화국 바로가기). '입법중심의 정책미디어'를 추구하는 머니투데이 the300으로선 '행정독재'를 더 우려할 수 밖에 없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정치권에 명분을 주기 위해 시한을 늦추고 자구를 수정한 중재안까지 내놓은 마당이다. 자구 수정 내용이 법안의 본질을 달라지게 하는건 아니지만, 국회의 지나친 행정간섭에 대한 우려를 인지하고 있다는 성의는 보인 셈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전혀 달라질게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건,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넘어서는 것이다. 국회의원 시절 박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에 맞서  세종시 원안고수를 관철해냈다. 행정부의 시행령남용을 견제하는 강력한 법안에 서명한 적도 있고, 행정부의 입법권 침해에 단호하게 맞서겠다는 발언도 했었다. 박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지켜야할 '원칙'은 오히려 이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밉더라도 새누리당으로서는 의미있는 자산이다. 표결을 하건 안하건 거부권을 행사하는 순간 대통령은 그 자산을 버리는 것이다. 박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원내대표의 말마따나 '어른스럽지 못한 길'이다.  국회법 개정안 표결에 참여한 새누리당 의원중 12명을 뺀 나머지는 자기 손으로 찬성표를 누른 사람들이다. 야당도 아닌 여당의원, 각자가 헌법기관인 이들에게 다시 반대표를 누르라는건 (아무리 비밀투표라지만) 잔인한 일이다. '힘'으로 유지되는 리더십은 힘이 조금이라도 빠지는 순간, 놀랍도록 빨리 무너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대응을 위해 미국방문까지 미뤘다. 
미국도 가지 않고 한 일이 입법부와 맞선 '거부권행사'여서는 국민들에게 명분이 안 선다. 황교안 국무총리 인준안도 국회, 특히 새누리당과 협조해서 통과시켜야 할 입장이다.

앞으로 밑져도 뒤로 남기는게 큰 장삿꾼이다. 이거저거 다 떠나 박정희 대통령때와 같은 '대통령의 봄날'은 이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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