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노무현…'영수회담'의 추억

[the300][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차가 아닌 다른 음료'(?) 마시며 대화하는 영국 수상과 야당 당수

이상배 기자 l 2015.08.03 07:20


1994년 5월12일, 영국 노동당 당수 존 스미스(John Smith)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영국 수상이던 보수당의 존 메이저(John Major)는 의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연설을 했다.

"수상과 야당 당수는 불가피하게 사적으로, 또 비공개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자리를 가질 때마다 나는 항상 그가 정중하고 균형감을 갖고 있으며 건설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강인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

우리는 항상 음료수를 함께 마셨는데 때로는 차를, 때로는 '차가 아닌 다른 음료'(?)를 마셨다. 그런 자리에서 우리는 업무적인 사안을 넘어서는 다른 여러 주제에 대해서도 토론을 나누곤 했다."

우리나라처럼 '적대적 정치'(Adversary Politics) 문화를 가진 영국에서도 수상과 야당 당수는 수시로 만남을 가지며 인간적 신뢰를 쌓는다. 때론 '차가 아닌 다른 음료', 즉 '술'을 마시며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수상과 야당 당수의 비공식 회동은 여야 대립으로 좀처럼 풀리지 않는 현안을 타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당 대표라는 게 없는 미국에선 대통령이 여야 개별 의원들을 직접 만난다. 아버지 조지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은 의회의사당 지하 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의원들의 핸드볼 경기에 꾸준히 참가했다. 또 운동을 좋아하는 여야 의원들끼리 스테이크와 감자를 구워 먹는 친목모임인 '체육관 저녁'(Gym Dinner)에도 빠짐없이 나갔다. 백악관이나 캠프 데이비드 등 별장으로 개별 의원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나 운동을 즐겼음은 물론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달 16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만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의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박 대통령은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에 대한 움직임은 없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17일 김 대표와 문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3자 회동을 한 뒤 4개월 넘게 문 대표와의 만남을 갖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영수회담에 신중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영수회담이 자칫 야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가장 크다. 영수회담이 끝난 뒤 야당이 사실과 다른 말을 밖에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에 영수회담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 했을 터다. 박 대통령은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9월7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고(故) 노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대연정'을 거듭 제안했고, 박 대통령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노 전 대통령은 "비판만 하지 말고 한번 (내각을) 맡아서 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앞으로는 아예 그런 말씀 꺼내지 말라"며 "연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을 꺼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가겠다"고 버텼다. 

당시 영수회담의 득실은 분명했다. 노 대통령이 불을 지핀 '대연정론'은 이후 힘을 잃었고, 박 대통령은 국가원수에 맞선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한층 더 굳혔다. 박 대통령의 뇌리 속에 영수회담은 대통령은 밑지고 야당 대표는 남기는 장사였다.

문제는 현행 국회선진화법 아래에서 야당의 협조없이는 어떠한 핵심 국정과제의 달성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최우선 목표인 노동개혁을 비롯한 '4대 구조개혁'이나 경제활성화법 처리 등은 모두 야당 지도부와의 담판이 불가피한 사안들이다.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등의 손해가 걱정된다고 영수회담을 미루는 게 능사일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과 문 대표 둘이, 또는 김 대표까지 셋이 수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신뢰를 쌓아 노동개혁이나 경제활성화법 문제를 담판짓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런 자리에 영국의 수상과 야당 당수처럼 '차가 아닌 다른 음료'(?)를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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